族譜硏究資料




統制使의길3 洗兵館터에 있던 延安金氏墓所
작성자 : 김재홍 작성일 : 2017-09-15 16:08:52       조회수 : 7765 파일 :

統制使의길3 洗兵館터에 있던 延安金氏墓所를 찾아서 2012.05.05

`김용재의 통영길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延安金氏의 始祖墓
延安金氏 先山 이곳이 延安金氏始祖金暹漢 墓所神道碑

- 家系圖 -
始祖의 4世孫이 마을入口에 있는 高麗門下贊成事延安金公祐神道碑이다,

始祖의4世孫을 延安金氏의“中始祖”로 이야기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분의 原來 墓(山所)가 洗兵館터에 있었는데 洗兵館을 지으면서 墓를 파내고 放置를 하여 統制使의 꿈에 나타났다고 한다.

다시 屍身을 收拾하여 北山(艅艎山=뱃산)에 (移葬을 했는데) 묻었다.

以後 이곳으로 移葬을 해와서 至今은 건나편 左靑龍 右白虎의 明堂자리에
山所를 쓰고 이곳에다 神道碑를 세웠다고 한다.

墓所에서 玲瓏한 구슬이 나왔으며, 一說에 依하면 무
무덤을 파니 鶴이 두마리가 나와 날라 갔다는 傳說이 있다고 한다(卽 移葬을 했다는 意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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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蓋國公의 아들 金汝嬅,金汝煜 兄弟가 남긴<<南行記聞, 1926년>>
澗松堂文集(文庫 保管)
虛舟文集 (古枕 810.819 김64허)
金汝煜(1581∼1661)字叔晦, 號 許舟,本貫 延安.

國寶 305호 統營洗兵館 (統制營)경남통영시 문화동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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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창건설화(洗兵館創建說話)
統營洗兵館 ~ 통영(統營)이란 地名 自體가 통제영(統制營)에서 制字가 빠진 준말.

統制營을 짓기 始作한것은 宣祖 36년(1603)때의 일이다.

第6代 統制使 李慶濬이 逗龍浦에서 統制營을 이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1604년(선조37)完工, 李慶濬이 이곳에 터를 닦고 2年뒤인 宣祖 38년(1605)에 洗兵館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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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制營의 洗兵館創建에 얽힌 이야기 가운데
김여엽(金汝嬅), 김여욱(金汝煜) 兄弟가 祖上의 先塋을 찾아 漢陽에서 統營으로 내려와 直接 보고들은 바를 紀行文으로 남긴 《南行記聞: 1626년)》이라는 文獻이 전해지고 있다.

이 紀錄에 怪異한 일을 적어두고 있는데, 그 內容을 간추리면 이야기는 大略 이러하다.

當時 漢陽에 살던 두兄弟가 이 故障에 統制營이 設置된 當時, `그들 先代인 金暹漢의 墓所가 파헤쳐져 遺失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듣고 이를 收拾하기 위해 급히 統營 땅으로 내려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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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6년 1월 10일 漢陽에서 出發하여 아흐레(9일)만인 18일 固城에 到着하여 많은 사람들을 만나 搜所聞 하니 洞里 어른들이 일러주기를 "元來 宅의 先祖는 固城에 살았으며, 家門이 매우 顯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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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여러곳(많은)의 先營 가운데 始祖의 墓를 어느해 頭龍浦에 옮겨(移葬) 端裝했는데, 그후 洗兵館을 세우면서 그 先塋이 파헤쳐지는 變을 當한 以後 家門이 衰退해 졌다는 이야기가 傳說 마냥 傳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때 무덤에서 金貫子가 나왔다는 所聞이 있었을뿐 아니라,

統制營이 들어서면서 이를 破墓하고 그 자리에 洗兵館을 새로지은 以後, 그 冤魂의 騷致로 統制使가 變死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고로 洗兵館에는 그 누구도 들어가기를 꺼려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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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日에 固城의 先塋을 둘러보고 다음날 20일에 固城郡守 李廷彦이 祭羞를 보내왔기에 祭物을 차리고 先營에 祭祀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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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日에야 비로소 統營에 가서 統制使 李守一(第20代 統制使)을 訪問하니 그는 忌避하고 만나주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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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統營땅에서 가장 明堂자리로 알려진 여황산 (艅舟皇山) 남쪽 기슭에는 當時 固城에서 顯彰했던 어느김씨(金氏) 家門의 先塋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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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代의 墓가 있었다는 境內를 두루 살펴보니 果然 左靑龍 右白虎가 뚜렷이 박혀있어 眞正 明堂임이 틀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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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길에 當時의 都訓導였던 朴斗甲을 만나 20餘年前 그때의 來歷을 물으니 自初至終을 이렇게 昭詳히 얘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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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制使 李慶濬이 甲辰年(1604년)에 統制營을 이곳 逗龍浦로 옮길때 部下 將帥로 하여금 墓를 파서 移葬케 했는데 그자들이 땅을파고 함부로 도끼질하여 石槨을 파낼때 金銀寶貨가 많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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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統制使가 이를알고 精潔한 곳을 찾아 移葬 하도록 命 하였으나 다시 軍卒들이 그만 풀덩쿨로 덮어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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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일이 있은후 統制使의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르기를 "네가 처음에는 내 葬地를 빼앗더니, 더 무슨 怨恨이 있기에 또 白骨마저 薄待하느냐" 고 크게 號筒 치므로 놀라 꿈에서 깨어나 部下를 불러 그 무덤에 관한일을 다그쳐 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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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官이 그제야 그 死體를 길가에 내버려 두었다고 實吐하므로 統制使는 卽時 그들을 잡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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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嚴重히 다스리는 한편 나(朴斗甲)에게 棺을 새로짜고 옷을 만들어 白骨을 다시 收拾하여 북쪽 여황산(艅 舟皇 山:배모습 같이생긴)에 移葬토록 命令하기에 祝文을 지어 祭祀를 지내고 嚴肅히 이를 施行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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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3일날 아침 다시 統制使를 찾아가 그 모든 事實을 말하니,
"歲月이 오래되어 나는 仔細히 알수가 없는일" 이라며 딴전을 피울뿐 이므로, 하는수 없이 쓸쓸히 돌아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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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그동안 우리 兄弟가 直接 現場에서 보고들은 바를 紀錄하여 後日 參考가 되기를 바랄 따름이라고 적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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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羅之貴姓也。有以言獲罪者。謫于延安。後世仍家焉。有爲四門博士者。諱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