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박사공





시조(始祖) 박사공 김섬한(金暹漢)

연대 : 고려명종조(高麗明宗朝)
관직 : 국자감사문박사(國子監四門博士)
배위 : 신번진씨(新繁陳氏)



1. 시조 섬한공의 행적

공(公)은 고려명종(高麗明宗-1170∼1197)때에 재세(在世)하셨던 분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 왕족으로 왕에게 직간(直諫-맞대하여 왕의 잘못을 간함)을 하다가 오히려 왕의 노여움을 받아 연안(延安)으로 귀양을 가서 한 집안을 이루었던 선조(先祖)의 후손(後孫)이다.
공은 신라왕통(新羅王統)의 명문후예(名門後裔)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학문을 게을리 하지않아 고금서적(古今書籍)을 통독(通讀)함으로써 옛 성현(聖賢)의 가르치심에 전심전력하니 그 깊고 오묘(奧妙)한 이치(理致)를 모르는 것이 없게되었으므로 그 이름이 관서일대(關西一帶-平安道)에 진동하였다. 당시 이지방의 안찰사(按察使-觀察使) 모인(某人-성명미상)이 공의 높은 학문과 어진 행적(行績)을 흠모(欽慕)하여 부단(不斷)히 교유(交遊)하더니 그 재직기한(在職期限)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 갈 때 공을 동반(同伴)하고 귀경했다.
공이 당시의 서울인 개성에 올라가신 당년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及第)하여 상사(上舍-高麗때 大學중의 하나)에 드시고, 다음 해에는 문과(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그후 국자감사문박사(國子監四門博士)가 되어 천하준재(天下俊才)를 관하(館下)에 모아 학문권장에 진력(盡力)하니 이로써 유학(儒學)이 날로 흥왕(興旺)하고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다.
이상(以上)은 시조박사공에 대하여 전해진 문헌(文獻)의 기록이며, 그 외의 공의 사적이나 그 선조의 역사는 알 수 없다.

시조 박사공께서 송도(松都)에 올라가 과거를 보시던 때가 명종조 어느해라는 기록은 없으나 모든 정세(情勢)로 보아 아마도 경대승이 정중부를 물리친 명종9년 이후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무지난폭(無知亂暴)한 정중부가 집권하고 있을때는 기존(旣存) 문신(文臣)들이 모두 박해를 당하고 있을 때인데 천하에 이름이 나있는 박사공께서 그 밑에 입조했을 리가 없었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조하신후 이의민·최충헌등의 계속적인 무인천하(武人天下)에서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고 벼슬이 겨우 정8품에 그치고 말았음은 그시대의 상황으로 어쩔 수 없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박사공의 관직인 국자감사문박사는 지금의 국립대학교수와 같다.
배위는 상서좌복야신번진극유(尙書左僕射新繁陳克柔)의 따님이다.
아드님 세분이 있었으니 1(자)子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준구(俊龜)공이요, 2자(子)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준룡(俊龍)공인바 후사(後嗣)가 없었고, 3자(子)는 대장군(大將軍) 준린(俊麟) 공이시다.
그런데 씨족원류(氏族源流)에는 준봉(俊鳳)이라는 아들이 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우리 족보(族譜)에는 구보(旧譜)에도 기록이 없다. 그리고 공에게는 담한(曇漢)이라는 형(兄)이 있었으나 기해보에 실전(失傳)된 것으로 되어있다.
공의 묘소는 1716년 간행된 기해보(己亥譜)는 물론 다른 문헌에도 기록(記錄)이 없어 알 길이 없다.
1960년에 대종회내에 시조박사공설단건비위원회(始祖博士公設壇建碑委員會-委員長瓚泳)가 조직되어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한결과 단시일내에 재정이 확보되어 1961년 5월 16일에 경상남도 통영군 도산면 원산리(慶尙南道 統營郡 道山面 院山里) 4世 문하찬성사 우(門下贊成事 祐)공의 묘역내(墓域內)에 공의 3(자)子 대장군 준링공(俊麟公) 및 손(孫) 판도판서 경성공(景成公)과 더불어 3위의 제단(祭壇)을 봉축(封築)하고 신도비(神道碑)를 건립(建立)하였으며, 1970년에는 공의 제1자(子) 호부원외랑 준구(俊龜)공 및 손(孫) 처사 묘성(昴成)공의 제단을 병설함으로써 부조손(父祖孫) 3세(世)5위(位)를 동일국내(同一局內)에 모시고 음력 10월13일에 시제를 올리다가, 지금은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선영에 옮겨 모시고 매년 양력 4월 둘째 일요일에 시제를 모신다.

2. 시조 박사공 재세 연대의 고려 사회

박사공께서 재세(在世)하시던 고려명종(高麗明宗)연대를 전후한 고려왕조의 국내사정(國內事情)을 고찰(考察)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려시대의 시대적 구분
고려 5백년 역사(歷史)를 4기(期)로 구분(區分)하여보는 것이 근래 사학계의 통례(通例)이다.
제1기 즉 태조(太祖-王建 )에서부터 제10대왕인 정종(靖宗-1046)까지 130년간은 재통일(再統一) · 재조직기(再組織期)이고, 제2기는 문종(文宗-1047)에서부터 예종(睿宗-1122)까지의 76년으로 구분되며 이기간은 황금기(黃金期)라고 하리만큼 정치·문화·국방등 모든 분야가 최고도로 발전하였으므로 고려조의 중흥기(中興期)를 이루었다.
제3기는 인종(仁宗-1123)에서부터 원종(元宗-1274)까지의 150년간인데 이 기간은 외침(外侵)등으로 인한 동란기(動亂期)라 할 수 있고, 제4기는 충렬왕(忠烈王-1275)으로부터 망국(亡國) 당년(1392)까지의 117년간인데 이기간은 쇠퇴기(衰退期)이다.

2) 동란기의 시작 : 이·탁(李·拓)의 변(變) 묘청(妙淸)의 난과 의종의 실정
나이어린 고려17대 왕 인종(1123∼1146)의 외조부(外祖父) 이자겸(李資謙)이 그의 당료(黨僚)인 탁준경(拓俊京)과 배가 맞아 일국의 정사(政事)를 마음대로 요리하여 온 조정을 자파일색(自派一色)으로 바꿈에 그치지 않고, 급기야에는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흑심(黑心)까지 갖었었다. 그러나 동료인 탁준경과의 사이가 나빠져서 탁준경의 손에 의하여 이자겸은 영광(靈光)으로 귀양을 가고 그 일파들도 멀리 유배되었다. 그러자 이자겸을 쫒아낸 탁준경은 이자겸대신 권세를 부리다가 그 이듬해에 자신도 귀양을 가고 말았으니 이때가 인종5년(1127)이었다.
이때에 북쪽에는 대금(大金)의 세력이 팽창하여 요(遼)가 망하고 송나라의 이제가 금국인에게 잡혀가는 동시 북송(北宋)이 남으로 쫓겨가서 남송(南宋)을 창설하는등 중국일대에 큰 변동이 일어나는 과정에 있을 때였다.
고려조는 안으로 이·탁(李·拓)의 변(變)은 끝났으나 대궐은 잿더미로 화하고 기강은 문란하여 국권(國權)이 서지 않는 형편이었는데 대륙의 파동(波動)은 장차 어찌될지 모를때였으므로 왕실(王室)을 비롯하여 중외(中外)의 인심(人心)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틈을 타서 평양의 술승(術僧) 묘청(妙淸)이 평양천도(平壤遷都)를 주장(主張)하다가 급기야 반란을 일으켜 한동안 나라안이 병화(兵火)에 휩싸이게 되었다. 결국 묘청의 난은 평정되었으나(인종 13년)조정내의 기강이 말이 아니더니 인종이 죽고 18대왕인 의종(毅宗)이 임금이 되었다.
의종은 정사에는 힘쓰지 않고 풍류(風流)와 사치에 빠지는 동안 왕족과 근척(近戚) 그리고 벼슬아치들도 풍류와 오락에 물들어 갔다. 이렇게 되면 국고(國庫)가 고갈(枯渴)되게 마련이니 따라서 백성들로부터 무리하게 세금을 마구 걷어 들여서 민원(民怨)이 하늘에 다달았다. 따라서 임금이 문약(文弱)하고 풍류만 좋아하니 글짓고 노래하는 문신(文臣)만이 왕의 총애를 받을 뿐, 무신(武臣)은 과거에 어떠한 공훈이 있었더라도 한축에 들지 못하였다.

3) 경계(庚癸)의 난과 명종의 즉위
무신에 대한 차별을 참다못한 장군(將軍)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등이 의종24년(1170) 9월에 합력하여 왕의 좌우에 있던 문신들을 모조리 쳐죽이고 왕인 의종과 태자(太子)를 경남의 거제도(巨濟島)와 전남의 진도(珍島)로 귀양 보내고 의종의 아우인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데려다 왕을 삼으니 이가 고려19대 왕인 명종(明宗)이었다. 이 변란을 경인(庚寅)의 난이라 한다. 그런데 이 경인의 난은 몇몇 무사의 정권쟁취(政權爭取)의 목적이라기 보다 오랫동안 문신들로부터 천대와 무시를 받아오던 무신들의 문신에 대한 보복행위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정권을 손아귀에 넣은 정중부등 무신들은 왕으로 세운 명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동안 굶주렸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되니 그들은 무관직으로서 문관직을 겸대(兼帶)하고 의종이 새로 지어놓은 관북택·천동택·곽정동택(館北宅·泉洞宅·藿井洞宅)을 정중부와 이의방·이고가 나누어 점거하는등 갖은 영리에 도취(陶醉)하여 그 호화스러운 생활은 전날의 문신들의 유가 아니었다.
그러던중 이 꼴을 보다 못한 동북면병마사 김보당(東北面 兵馬使 金甫當)은 명종3년(1173)에 군사를 동계(東界)에서 일으켜 정중부·이의방을 성토(聲討)하고 전왕(前王)을 복위코자 먼저 부장을 거제도에 보내어 의종을 받들고 경주(慶州)에 출거케 하였다. 그러나 이 복위운동(復位運動)은 김보당이 잡혀죽음으로 써 수포(水泡)로 돌아가고 말았으나 김보당이 처형당하는 마당에서 문관은 거개가 자기와 공모(共謀)하였다는 말에의하여 전날 화를 모면했던 문신중에 추가로 화를 당한 사람이 부지기 수 였다. 이것이 명종3년10월에 일어난 일이니 이것을 의종24년 경인의 난과 아울러 경계(庚癸)의 난이라고 한다.

4) 경대승(慶大升)의 도방(都房)정치
그 후에도 정중부·이의방등 권세가를 숙청(肅淸)하기 위하여 여러번 여러곳에서 의거(義擧)가 일어났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는 중에 이고는 명종원년에 저희끼리 세렴다툼을 하다가 이의방에게 격살(擊殺)당하였었고, 이의방은 명종4년 12월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에게 살해당했다. 이때에 정중부는 수상(首相)이되어 그 일족이 부귀영화를 독점하고 세도를 부리더니 명종9년(1179)에 장군 경대승(慶大升)에게 주살(誅殺)되고 말았다.
경대승은 청주인(淸州人)이니 26세에 청년무부로 본성이 염직(廉直)하여 정중부등의 발호(跋扈)를 분하게 여겨오던중 중부의 소행이 거거익심(去去益甚)하여 왕의 마음을 대단히 불안케 함을 보고 의분에 못이겨 마침내 칼을 뽑았던 것이다. 이 경대승의 의거에 대하여 왕이하 문신은 물론 큰 쾌감으로 맞이하였지만은 무신 중에는 불안과 불쾌지심을 품어 그를 해치려하는 자도 많았다. 대승은 반동분자를 기회있을때마다 숙청하는 동시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문하에 항상 용사(勇士)백수십명을 두고 이름을 도방(都房)이라고 하더니 명종13년에 그논 병사(病死)하고 맡았다. 도방은 일종의 사병(私兵) 제도로서 그후 권세를 가진 무신들이 이제도를 답습하였다.
경대승이 죽은 후에 정중부·이의방의 일파였던 이의민(李義旼)이 조정요직(朝廷要職)에 앉아서 정권을 독재하더니 명종26년(1196) 장군최충헌(崔忠獻)형제에게 그 일족과 더불어 섬멸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고려조는 이어 최씨의 세습적(世襲的) 집권체제(執權体制)로 들어갔다. 이듬해인 명종 27년(1197)에는 명종을 왕위(王位)에서 물러나게하고 명종의 아우 민(旼)을 왕으로 앉히니 그가 고려제20대왕인 신종(神宗)이다.

3. 고려 국자감

시조 박사공께서 재직하셨던 고려시대의 교학제도(敎學制度)인 국자감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고려15대왕인 숙종(肅宗)은 글을 좋아하는 임금으로서 지금의 국립종합대학격인 국자감을 설치하고 거기에 서적포(書籍鋪)를 두어 모든 서적을 출판 또는 보존케 하였다. 그 다음대(代)인 예종도 부왕(父王)인 숙종의 뜻을 이어 관학진흥(館學振興)에 힘을 써서 국학이 칠재(七齋)를 설치하고 학생은 시험을 쳐서 뽑게하는등 그 내용을 충실히 하였다. 7재란 즉 7종의 전문강좌로서 여택재 · 시빙재 · 경덕재 · 구인재 · 복응재 · 양정재 · 강예재(麗澤齋 · 侍聘齋 · 經德齋 · 求仁齋 · 服膺齋 · 養正齋 · 講藝齋)이다. 그중 6재는 유학재(儒學齋)요, 강예재만이 무학재(武學齋)로서 국학에 문무양학을 두게된것이다. 이로인하여 문풍이 크게일어났으니 김인존 · 박승중 · 곽여 · 정극공 · 홍관 · 김부일 · 윤언이 · 정지상 · 정항 · 김부식 · 이인실 · 권적(金仁存 · 朴昇中 · 郭與 · 鄭克恭 · 洪灌 · 金富佾 · 尹彦頤 · 鄭知常 · 鄭沆 · 金富軾 · 李仁實 · 權適)등은 당시의 쟁쟁한 유학자요 문인(文人)이었다.
다음대인 인종역시 호학하는 임금으로서 국자감의 내용을 더욱 충실히 하여 경사육학(京師六學)에 국자학 · 태학 · 사문학 · 율학 · 서학 · 산학(國子學 · 太學 · 四門學 · 律學 · 書學 · 算學)의 여섯가지 학목(學目)을 정비하는동시 지방의 주현(州縣)에는 향학(鄕學)즉 향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다.
국자학(國子學)은 문무관 3품이상의 자제들만이 입학할 수 있었는대 거기서는 경학공부가 위주이고 교관(敎官)은 박사 · 조교(博士 · 助敎)가 담당했다.

태학(太學)은 문무관 5품이상의 자제가 입학하였으며, 사문학(四門學)은 문무관 7품이상의 자제가 입학하는데 학과(學科)나 교관은 국자학과 다를게 없었으나 국자 · 태학 · 사문학은 학생의 신분에 의하여 구별되고 경학을 주로하여 산수와 시무책(時務策)등을 겸하였는데 졸업년한은 8년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