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지지






●위치(位置)

연안(延安)은 동으로 백천군계(白川郡界)가 30리, 서로 평산군계가 31리, 남으로 해봉(海峯)이 29리, 북으로 평산군계가 33리이며 서울이 288리이다.

●연혁(沿革)

고구려(高句麗)시대에는 동음홀(冬音忽) 또는 시염성, 신라시대에는 해고군(海皐郡), 고려(高麗)시대에서는 처음에 염주라 하였으며 성종조(成宗朝)때 방어사를 두었었다가 현종초(顯宗初)에 방어사를 폐지하고 해주(海州)에 예속시킨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었다. 고종(高宗)때에 단병(丹兵)을 물리친 공으로 영웅현령으로 승격시켰더니 그 후 현인(縣人) 차송우(車松祐)가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됨으로써 복주(復州)로 고쳐 지사(知事)를 두었다. 원종(元宗)때에 또 이분희(李汾禧)가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어 석주(碩州)로 고치고 충렬왕(忠烈王)때에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시켰더니 충선왕(忠宣王) 시대에 목(牧)을 강등(降等)하여 연안부(延安府)로 고쳤다.

이조태종조(李朝太宗朝)에 경기도(京畿道)로부터 황해도(黃海道)로 예속되었다.
이조말에 연안군(延安郡)으로 고쳤는데 일제침략시절(日帝侵略時節)에 이웃 배천군(白川郡)과 합병하여 연백군(延白郡)이 되었었다. 해방당시에는 대부분 38도선 이남이었으나, 6.25 사변의 휴전과 더불어 북한에 속하게 되었다.

●지세(地勢)

남(南)에는 와룡지(臥龍池)요, 북(北)에는 비봉산(飛鳳山)이며, 동남(東南)은 끝없는 바다가 하늘에 닿았으니 관서(關西) 제일의 고을이다.

●산천(山川)

봉세산(鳳勢山)은 북으로 3리이니 일명(一名) 비봉산(飛鳳山)이다. 천배산(天拜山)이동으로 20리에 있고 도정산(都正山)은 남으로 2리 밖이요 문서산(文書山)은 동으로 6리에 있다. 용박산(龍縛山)은 북으로 20리인데 변계량의 유시(遺詩)가 남아있고 태자산(太子山)은 북으로 25리, 증산도(甑山島)는 남으로 25리, 수락산(水洛山)은 남으로 31리, 여애산(餘哀山)은 서로 45리, 우리도(于里島)는 남으로 37리, 가이도(加耳島)는 서로 45리, 적촌포(赤村浦)는 동쪽 20리, 풍천(楓川)은 서로 21리, 금련포(金蓮浦)는 동으로 8리, 각산진(角山津)이 동으로 35리, 나진(那津)과 소초포(所草浦)는 동으로 21리이며 와룡지(臥龍池)는 남쪽 3리 밖에 있는데 일명 남대지(南大地)라하며 주위가 20리이다.

●인물(人物)

고려(高朝) : 태평(泰評) 윤선(尹瑄), 김도(金濤), 김장수(金長壽)
이조(李朝) : 김노(金輅), 김자지(金自知), 김여지(金汝知), 김효성(金孝誠), 이귀령(李貴齡), 이석형(李石亨), 김하(金何), 이보정(李補丁), 이숭원(李崇元), 이숙기, 김제신(金悌臣), 김흔, 김윤(金崙), 김심(金諶), 김전(金詮), 김붕, 김감(金勘)

●성씨(姓氏)

金, 宋, 李, 洪, 高, 康, 田, 鄭, 車, 魯, 段, 黃, 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