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관





●신림동회관(新林洞會館) : 현회관(現會館)

所在地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본동 10-388
입주일 : 1990. 7. .

우리 대종회(大宗會)는 동대문구 전농동(典農洞) 회관(會館)에서 대소종사(大小宗事)를 수행(遂行)해온지 30여년, 우리 대종회(大宗會)도 종회보(宗會報)가 월간(月刊)으로 발행(發行)되고 80년 초반에는 세사(世史) 1ㆍ2집(輯)의 편찬(編纂)과 정묘대동보중수(丁卯大同譜重修)를 무난히 마침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이러한 분위기속에 새회관 건립사업(建立事業)을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樹立)하여 1989년3월 위원회(委員會)에 상정(上程)하였다.

그 案이 同年 4月13日 理事會議에 附議된 바 舊會館 典農洞 垈地 60坪에 改築하자는 側과 他地域으로 百餘坪의 垈地를 確保하여 新築하자는 側으로 兩分되어 同年 4月20日 第32回 定期總會에 回附로 全宗員의 意見을 모은 結果 會館建立推進委員會를 構成하고 그 모든 賣渡買受 및 豫算策定執行 等 一切를 同委員會에 委任을 決議했으며 同年 5月30日 第1次 會館建立 推進委員會를 開催하고 舊會館 賣渡金으로 約1億5千萬원, 世史 및 大同譜 剩餘金 1億원, 募金豫定額 1億원으로 計 3億5千萬원을 目標하고 募金을 開始하였다.

그 結實로써 많은 宗員들의 獻誠 申請中 同年9月 濟州翰林學士公派宗會를 尋訪하여 秉彦氏 文敏氏의 積極的인 推進後援으로 每日每夜 12日間 各門中別로 行한 尋訪會議開催가 點火되어 8百餘萬원의 獻誠金이 接受됨으로써 各派宗會 및 各地域宗親會의 全任員이 더욱 確固한 信念으로 合心努力하매 募金은 더욱 拍車를 加해져 갔던 것이다.

同年 11月十八日에는 六何學院理事長 琮成氏께서 恪別한 激勵와 一金壹千萬원 獻誠의 快擧를 契機로 各地方宗中 및 在京宗親들의 獻誠遝至가 燃燒되자 앞날의 成事가 豫見되어 同年 12月20日에 推進委員會를 開催하고 現地物色에 對한 任員間의 意見差를 줄여 機動性있는 迅速을 期하기 爲하여 7人小委員會를 構成하고 모든 推進執行에 委任을 決議하였다.

獻誠金은 2億3千萬원에 이르렀고 數朔間 십여곳의 建物을 踏査하던 中 마침내 서울大學校의 隣近이요 交通이 便利하고 圓滑한 産業道路邊으로 垈地 124坪 地上地下 6層 建坪380餘坪인 現建物을 代金拾貳億參千萬원에 契約이 締結되었다.

그러나 이 不足金을 充當키 爲해서는 萬不得已 楊平의 林野一部를 宗人에게 賣渡하기로 하고 第33回 定期總會에서 決議하여 行動에 옮겼으나 中途金支拂日을 臨迫하여 一方的인 一部分 解約으로 蹉跌이 發生하여 困難中에 諱 성字 通德郞公宗中(代表 麟基氏)에서 그 解約된 林野를 買受함으로써 解決을 보았고 貳千萬원 差額의 困境까지도 同宗中에서 一金貳千萬원을 獻誠하여 줌으로 그 險難했던 迂餘曲折과 難關을 克服하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至誠이면 感天이라고 할까. 列先祖의 蔭德으로 全國十萬宗員의 渴望에 副應하여 宗親間의 敦睦强化와 崇祖精神의 涵養과 後進들에 對한 倫理精神의 啓導 等을 目標로 하는 精神文化의 求心處로서 새 會館이 서울 特別市 冠岳區 新林本洞 10의388번지에 敬虔한 偉容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전농동회관(典農洞會館) : 구회관(舊會館)

소재지 : 서울特別市 東大門區 典農洞 530의80번지
1959년 7월8일 종무실(宗務室)로 개관(開館)

1956년 9월9일 大宗會 창립총회(創立總會)를 마치고 발족하여 상설(常設) 사무실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공평(公平)동 63번지 소재 대경상회(大京商會 思鳳씨 소유)내에 개설(開設)하고, 1957년11월30일 종로2가 가영(佳永)빌딩에 사무실을 임차(賃借)하여 정유대동보(丁酉大同譜)를 중수(重修)하여 반포(頒布)를 마치고, 대종회 회장단(會長團)회의에서 회관건립(會館建立)이 의결되어 전 부회장(前副會長) 고(故) 원태(元泰)씨(開) 70만환, 전 대종회장 종성(鐘聲)씨(內) 40만환, 전 부회장 고(故) 종찬(鍾瓚)씨(內) 30만환, 전 부회장 고(故) 한영(翰泳)씨(內) 20만환 등 계 160만환을 출연(出捐)하였다.

정유대동보(丁酉大同譜) 잉여금(剩餘金) 20만환을 합하여 180만환으로 냉천동(冷泉洞)의 회관건물(會館建物) 매매계약(賣買契約)에서 상대방(相對方) 매도인(賣渡人)의 위약(違約)으로 인한 배상금(賠償金) 50만환이 입금되어 총230만환으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典農)동 530번지의 80호 대지(垈地) 69평 한옥(韓屋) 건평 28평을 190만환에 매입(買入)하고 등기비용등 10만환 가옥(家屋) 수리비 30만환으로 230만환이 소요(所要)되었다.

당시는 민법개정(民法改正)전이라 대종회(大宗會) 명의(名義)로는 소유권(所有權) 등기가 불가능(不可能)하여 부득이 당시의 임원(任員) 찬영(瓚泳)씨, 원태(元泰)씨, 사봉(思鳳)씨, 경기(敬基)씨, 종찬(鍾瓚)씨, 종성(鍾聲)씨, 한영(翰泳)씨 등 8人 공동명의로 등기하였다.

1959년 7월8일 종무실(宗務室)로 개관(開館)하고, 다음해 봄에 장학관(獎學館)을 설치하여 지방출신(地方出身) 재경대학생(在京大學生)의 회관으로 운영하여 200여명의 인재(人材)를 양성(養成) 배출(輩出)하였다.

1974년 대종회 정기총회에서 회관 소유권(所有權)을 대종회로 명의 이전을 의결하고, 사망(死亡)한 명의인(名義人)의 상속관계가 복잡하여 심한 어려움과 소송절차(訴訟節次)가 난삽(難澁)할 뿐아니라 일부(一部) 상속인의 반대등으로 10여년의 곤란속에 변호사(辯護士) 당시의 대종회장 주용(柱容)씨의 추진으로 명의를 이전하여 현회관 건립에 2億1千500만원에 매도(賣渡)하여 큰 재원(財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