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보





大宗會報(대종회보)

『연안김씨 대종회보』는 1980년3월10일에 창간하여 2008년 1월로써 335호를 발간하였다. 월간으로서 335호이니 사람으로 치면 만 28살의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는데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 오랜 세월이다. 그간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단 한 번의 결간도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은 우리 연안김씨의 저력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종회보를 발간하게 된 동기를 찾아보면 1979년10월 당시 대종회총무 대영(旲泳)씨가 한국씨족협회에 참석하였다가 진천송씨 회장으로부터 진천송씨종회보를 받아보고서 우리도 종회보를 발간해야겠다고 작심한데서부터 시작 된다.
신문발행은 3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한다. 첫째는 신문을 발간할 수 있는 재원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신문지면을 채울 수 있는 기사가 있어야 하고, 셋째는 신문을 발간할 수 있는 인재가 있어야한다. 그런데 당시의 여건으로서는 이 세 가지 요건을 구비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초심을 관철하려는 의지 하나로 동분서주하며 많은 종원들을 설득한 결과 1980년2월20일 임시이사회를 개최하여 종회보발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장 수영(壽泳:대종회장) 부회장 사원(思元), 인기(麟基), 문기(文基), 종성(鍾聲), 동건(凍鍵), 종갑(鍾甲), 광제(光濟), 총무 병기(昞基), 대영(旲泳), 편집주간 장각(長脚), 편집위원 종석(鍾奭), 종호(鍾昊), 기린(起麟), 재린(在麟), 그리고 경비는 인기(麟基) 20만원, 종성(鍾聲) 20만원, 고원군사공파종회 10만원, 문기(文基) 10만원, 영회(永會:內) 10만원, 종성(琮成) 5만원, 동건(凍鍵) 5만원, 등 80만원의 찬조금으로 1980년3월 10일 드디어 연안김씨대종회보 창간호 2000부가 인쇄되어 그중 1700부를 종원들의 가정에 송달하였다. 이는 조상님께서 돌보신 덕이요, 10만종원의 숙원을 해결하는 쾌사였다.

종회보 편집인으로는 초대 장각(長脚:開), 2대 종석(鍾奭:內), 3대 종윤(鍾潤:內), 4대 사균(思均:內)으로 계속되면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
종회보는 기사중심 소식지로서 타불로이드 판 4면인데 1면과 3면은 기사중심으로 하되, 1면은 그래도 무게가 있는 기사, 3면은 조금 가벼운 기사, 2면은 학술적인 기사와 교양기사, 4면은 문화면으로 시, 수필 잡문 등으로 교양적인 소양을 높이는 내용으로 원칙을 세우고 있다.

종회보는 발간이래로 대종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대종회의 크고 작은 행사나 소식을 전 종원에게 알림으로써 대종회와 지역 종원간의 격차해소․유대강화는 물론 종원 상호간의 돈목을 강화하였고, 저변을 확대하여 많은 종원들이 동참하게 되어 일족으로서의 동질감․일체감을 함양하였다. 지상보학 등으로 조상을 알고, 뿌리를 아는 데에 좋은 자료를 제공하였고, 현조들의 문집이나 벼슬, 사회적 지위, 국정에 미친 영향 등 생활상을 기술하여 후예들의 긍지를 높였을 뿐 아니라 후손들의 나아갈 지침을 제공하였으며, 파뭍혀 사장될 뻔한 귀중한 문집이나 사료들을 발굴하여 전 종원에게 알렸으며, 그릇됨을 시정하였다. 또 교양이나 문화면에 격조 높은 작품들로써 독자의 기호를 충족시키고, 교양을 드높였다.

현재 편집인의 좌우명은 “오늘의 오류가 내일의 정사(正史)가 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된다”이다 종사에 관여하면서 절실히 느낀 것은 선대의 현조들께서 기록한 내용에 오류나 오기, 미확인된 기록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럴 때 후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득관 이래 9백년, 안락당집이 발간(1514년간)되고 5백년, 기해보가 간행(1719년간)된 후로 3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현조들의 기록이 너무 신성시되고 불가침적인 성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기록의 수정이 없어서 오류나 오기가 계계대대로 전승되어온 것이다. 그래서 더욱 오늘의 종회보가 백년후의 종사에 양질의 자료가 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활자하나, 사진 한 장에도 세심한 주의와 애정이 깃든 정성으로 오류를 미연에 방지하여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