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김의 연원





연안김씨는 신라 김씨왕족의 후예이다

신라시대 김씨왕족의 후손으로 형제가 왕에게 바른 말로 간하다가 오히려 왕의 미움을 받아 형은 북빈경(지금의 강릉)으로, 아우는 시염성(지금의 연안)으로 유배되어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았다. 연안김씨는 연안으로 유배된 아우의 후손으로 고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한 국자감 사문박사 김섬한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박사공 이상의 선계는 오래되고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연안김씨는 고려 명종(1170-1197)때의 국자감 사문박사 김섬한(金暹漢)공이 시조이시다

연안김씨의 상계(上系)를 기록한 문적 중 가장 오래된, 중종9년(1514)에 간행된 김안로(金安老)편저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 안락당집(顔樂堂集)에 따르면 신라 종성(宗姓)으로서 형제 두 분이 왕에게 직간을 하였다가 도리어 왕의 미움을 사서 형은 북빈경(지금의 강능)으로 유배되고, 아우는 시염성(지금의 연안)으로 유배되었는데 시염성으로 유배된 분의 먼 후손으로 고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를 지내신 김섬한(金暹漢)공이 연안김씨의 시조이시며, 시조 박사공 이상의 선계는 오래되고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고, 시염성이 연안으로 개칭됨에 따라 연안(延安)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했다.

공께서는 일찍이 학문을 좋아하여 명성이 관서지방에 진동 하였다. 당시(고려 명종조)의 안찰사가 예를 갖추어 공을 찾아다니더니 임기가 만료되어 귀경 할 때에 같이 상경 하였다. 이어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를 을과로 급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를 제수 받았다. 공께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을 권장하니, 이로써 학문이 날로 흥왕하고 문풍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공은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극유(克柔)공의 따님인 신번진씨(新繁陳氏)를 배로 맞아 슬하에 아드님 셋을 두었으니, 장자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준구(俊龜)공이요, 2자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준룡(俊龍)공이며, 3자는 대장군(大將軍) 준린(俊麟)공이시다.

연안김씨는 22개의 파(派)가 있으며 그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시조 박사공의 제1자인 2세 준구공의 1자 3세 묘성(昴成)공은 처사요, 4세 유간(裕簡)공은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이고 5세 대의(大義)공은 밀직부사(密直副使)요, 대의공의 1자 백(伯)공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이고 2자 실(實)공은 호군(護軍)이며, 백공의 자(子) 7세 신검(信劒)공은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이요, 실공의 자 7세 승석(勝碩)공은 대호군(大護軍)인데, 호부원외랑 준구공의 후손은 대대로 관서지방에서 번창하였다.

시조 박사공의 제2자인 2세 준룡공은 후손이 없으며, 시조 박사공의 제3자인 2세 준린공은 상서 좌승선(左承宣) 광윤(光胤)공의 따님인 군위박씨(軍威朴氏)를 배로 맞아 3세 경성(景成)공을 낳으니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이고, 경성공의 1자 4세 비(裨)공은 전공판서(典工判書)요, 2자 우(祐)공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이고, 우공의 1자 5세 광택(光澤)공은 지단주사(知湍州事)요, 2자 광후(光厚)공은 밀직제학이고, 광후공의 1자 6세 완(浣)공은 태상록사(太常錄事)요, 2자 도(濤)공은 일찍이 중국 명나라의 제과에 등과 하였고 공민왕으로부터 김도장원나복산인(金濤長源蘿葍山人)이라는 여덜자의 친필을 하사받으니 살던 곳이 팔자동(八字洞)이 되어 유명하며 벼슬은 밀직제학이다. 도공의 1자 7세 시 문정(諡 文靖) 자지(自知)공은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요, 2자 시(諡) 문익文(翼) 여지(汝知)공은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요, 3자 치지(致知)공은 예빈시윤(禮賓寺尹)이요, 4자 학지(學知)공은 황해도 도관찰사 겸 해주목사이다. 대장군 준린공의 후손은 기령(畿嶺)에서 번성하니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연안김씨는 8세에서 분파(分派)하여 22개파 약10만 종원이 경향각지에 산거 하면서 저마다의 책무를 다하며 종훈(宗訓)인 숭조(崇祖)∙돈목(敦睦)∙계후(啓後)의 구현 실천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연안김씨는 국중화족이요 거족명문이다

옛 문헌에 이르기를 “예부터 문벌을 말 할 때에는 으레 연김(延金)을 들추었다”고 하였으니 연김은 국중화족이요 영락세족으로 번창해 온 거족명문이다. 연안김씨는 국구(國舅) 1원, 왕비 1원, 부마 1원, 봉군(封君) 5원, 공신 5원, 문형(대제학) 3원, 청백리 3원, 서원배향 5원, 생사당 배향 2원, 종묘배향 2원, 문과등제 171원, 무과등제 174원, 사마시 342원, 그 중에 문과장원을 9원이나 배출하여 1∙2품의 대관이 85원에 이르렀다. 대관중에는 영의정이 4원, 좌우의정이 2원, 시호(諡號)를 받은 분도 23원이나 되어 명실 공히 나라안 대성으로 계계승승 번창하여 왔다.

강물 흘러 800년! 씨는 자라서 열매가 되고, 열매는 다시 씨가되어 도도히 살아온 문벌씨족 연안김씨에 영광이여 영원하라.

연안김씨의 연원은 안락당집(顔樂堂集)의 세계기록에서 유래된다

안락당집은 중종11년(서기 1516년)에 희락당 김안노(金安老)공이 간행한 문헌이다. 그가 아버지 안락당이 생시에 지었던 시문(詩文)을 편집(編輯)하여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그 문집 끝에 자기 집 세계(世系)와 안락당의 연보(年譜)를 기록하였다. 그 세계 부분은 다음과 같다

“延安金氏世系錄 金氏系出新羅宗姓初兄弟二人在國直諫오王流遠地遂除籍兄居北濱京弟居시鹽城因家焉高句麗時冬參忽地稱시鹽城後改海皐郡隸西海道高麗改號鹽州恭愍朝改延安府今因之 國子博士諱暹漢是其後孫由博士公以上世遠無籍不可考”

위 원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김씨는 신라왕족에서 나왔다. 처음에 형제 두 사람이 있어 옳은 말로 왕에게 간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받아 먼 곳으로 유배되고 제적되어 형은 북빈경에 살았고, 아우는 시염성에 살면서 한 집안을 이루었다. 시염성은 고구려 때 동음홀 땅으로 후에 해고군으로 고쳐 부르고 서해도에 예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염주라고 불렀으며 공민왕 때 연안부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시조 국자감 사문박사 휘 섬한은 그 후손이며 박사공 이상의 세계는 아득히 멀고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다”

안락당과 그 유집을 편집한 희락당은 누구인가

안락당은 시조박사공의 9대손으로 성종조(成宗朝)의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이름은 흔이요, 안락당은 그의 당호(堂號)다. 사마양시(司馬兩試)와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을 한 수재(秀才)로 성종임금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줄곧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국내외의 예문(藝文)에 종사하였고 벼슬은 공조참의(工曹參議)까지 하다가 45세 때에 작고(作故)한 분이다. 안락당이 성종임금의 명을 받아 두시(杜詩)와 황산곡시(黃山谷詩)의 언해(諺解)와 번역을 하여 후세의 시문학(詩文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안락당의 셋째 아들로 희락당(希樂堂)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분 역시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한 수재로서 문장가(文章家)이며 정치가(政治家)로서 중종조(中宗朝)에 벼슬이 좌의정(左議政)까지 올랐다가 간당 윤원형(尹元衡)의 무고(誣告)로 사사(賜死)를 당한 분이다.

희락당은 과연 어떠한 근거로 이와 같은 기록을 하였는가

안락당집에 써있는 우리 시조사는 안락당집을 편집한 희락당이 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희락당은 상기 유집서문(遺集序文)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敍述)하고 있다.

"오호라 선조의 덕행을 현양(顯揚)함에 내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종문(宗門)이 시조로부터 선부군(先府君)에 이르기 까지 세월이 쌓여서 세대가 아득하고 또 계적(系籍)이 없어진 채 나의 대에 와서도 증조와 고조 이상은 자세하지 못하여 일찍이 통탄함을 금치 못하던 차에 선고(先考)의 유집편찬을 끝내고, 이어서 보고 들은 바와 고보(古譜)를 두루 검증(檢證)하여 세계를 기록하고 이 유집의 말미(末尾)에 붙이노라”라고 썼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희락당이 기술한 시조사는 연안김씨고보(延安金氏古譜)에서 나왔음이 확실 하다는 것과, 그 당시인 중종 11년(1516)에 벌써 고보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 족보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즉 우리김씨의 보사(譜史)는 기해보(己亥譜)를 간행한 숙종45년(1719)보다 약 3백년 가량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문화유씨(文化柳氏)의 가정보(嘉靖譜)는 물론이요,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성화보(成化譜)보다도 먼저 우리 고보가 이루어졌다는 결론(結論)이 된다.

우리 연안김씨의 시조발상(始祖發祥)이 이와 같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나도는 사서류(史書類)중에는 이를 잘못 기록한 것이 더러 있다.
세간에는 확실한 고증(考證)도 없이 "신라김씨동원분관록(新羅金氏同源分貫錄)"에 박사공이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의 제2자 영광(英光)의 증손(曾孫)으로 기록되고, "신라대보공알지선원계보(新羅大輔公閼智璿源系譜)"에는 박사공이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의 제2자 영광(英光)의 8대손(중간 5대는 미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에는 박사공이 경순왕(敬順王)의 14대손 또는 신라왕자(新羅王子) 영광(英光)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연안김씨파종중의 하나인 직강공파박천종중(直講公派博川宗中)에서 1912년과 1940년 양차에 걸쳐서 간행(刊行)한 파보에서 시조 박사공을 경순왕(敬順王)의 12대손으로 오기한바 있다.

심지어 "가락왕손(駕洛王孫) 2000년사(年史)"에는 연안김씨 장파계(長派系)가 가락계김씨(駕洛系金氏)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실로 통탄(痛歎)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또한 위 안락당집의 "형이 북빈경(지금의 강릉)에 살았다"라는 기록을 미루어 짐작하여 강릉김씨와 형제라는 설이 구전되어 내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추측일 뿐 확실한 고증이 없다.

2006년 3월 10일 연안김씨대종회(延安金氏大宗會) 현창연구위원회(顯彰硏究委員會)는 다른 집안 족보류(族譜類)의 기록을 일축하고 안락당집(顔樂堂集)에 근거하여 우리 연안김씨의 세계(世系)를 재확인하였다. 십만종원(十萬宗員)들은 다른 집안 족보류(族譜類)나 문헌(文獻)의 잘못된 기록을 일축하고 바로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