族譜硏究資料




三賢祠의 由來와 遺墟碑
작성자 : 김수영 작성일 : 2017-09-15 16:05:56       조회수 : 1002 파일 :

三賢祠의 由來와 遺墟碑

延安金氏大宗會顯彰硏究委員會
硏究委員 博士公25世孫 壽泳(直講公派羅山宗中)



 


< 목 차 >


 Ⅰ. 삼현사(三賢祠)
    1. 삼현사(三賢祠)의 유래(由來)
    2. 서원(書院)의 훼철과 삼현사유허비(三賢祀遺墟碑)
 Ⅱ. 삼현사유허비문(三賢祠遺墟碑文)의 출전과 국역
 Ⅲ. 삼현사유허비문(三賢祠遺墟碑文)
    1. 삼현사유허비문(三賢祠遺墟碑文)
    2. 삼현사유허비문(三賢祠遺墟碑文) 역해 



 


Ⅰ. 삼현사(三賢祠)

1. 삼현사(三賢祠)의 유래(由來)

  1) 개요
삼현사는 전남 담양군 수북면 나산리(羅山里)에 있던 서원(書院)으로, 고려 밀직제학 나복산인(蘿葍山人) 김도(金濤, ?∼1378)와 그 두 아들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 문익공(文翼公) 김여지(金汝知)의 학덕과 절의를 추모하여 호남일대의 유림들이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사를 올리며 아울러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원은 선현(先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로 이루어지는데, 삼현사에도 사우외에 청소년을 교육하던 사재(思齋)라는 당호(堂號)의 서재가 있었다. 지역의 자재(子弟)들을 교육하던 사재는 1792년에 건립되었고, 사우인 삼현사는 1827년에 건립되었다.

  2) 직강공파 나산종중(羅山宗中)의 집성촌
삼현사는 이곳 나산(羅山)에 세거(世居)해온 연안김씨(延安金氏)와 관련이 있다. 나산은 연안김씨 13세(世) 처사(處士) 인개(仁漑)공이 임진왜란 직후 처음 거처를 잡은 후 그 후손들이 직강공파나산종중(直講公派羅山宗中)을 이루어 세거해온 마을이다. 입향조(入鄕祖) 인개(仁漑)공의 손자 수오(粹五)공이 1663년(현종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종성도호부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호(灝)공이 서기1678년(숙종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으나 불행히 일찍 별세하였다. 호(灝)공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큰아들 상면(相冕)공은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둘째 상규(相圭)공은 신천군수(信川郡守)를 지냈고, 셋째 상옥(相玉)공은 서기1709(숙종35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전라도암행어사, 황해도관찰사,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지냈으며, 백부 순(洵)공에게 출계(出系)한 넷째 상신(相紳)공은 서기1726년(영조2년) 식년문과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었으며 서기1765년(영조41년)에 별세하니 시호(諡號)는 희정(僖靖)이다.
이 분들의 후손 중에 문과급제자가 여럿이 나왔다. 상신(相紳)공의 아들 용(容)공이 서기1761(영조37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니 증조(曾祖) 수오(粹五)공, 할아버지 호(灝)공, 아버지 상신(相紳)공에 연이어 4대(代)가 문과에 급제하는 기록을 세웠다. 상옥(相玉)공의 손자 재순(載順, 1732∼1790)공이 서기1759년(영조35년) 직부전시(直赴殿試)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대사헌을 지냈으며, 재기(載器)공은 서기1775(영조51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상면(相冕)공의 손자 재두(載斗)공이 서기1775년(영조51년) 정시문과에, 재익(載翼)공은 서기1784년(정조8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고, 재익(載翼)공의 아들 진(鎭)공이 서기1785년(정조9년) 증광문과에, 전(銓)공은 서기1794년(정조18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상은 정조(正祖)이전 즉 서기1800년까지 나산종중의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에 대한 내용이다. 이외에 생원진사과(生員進士科)에 급제하거나 음사로 관직에 나간 인물도 많다. 이와 같이 나산종중은 조선후기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호남의 명문가(名門家)로 자리 잡고 있었다.

  3) 삼현사의 건립
당시 나산에는 문중의 자제들을 교육하고 서책을 보관하던 사재(思齋)라는 서재가 있었다. 서재의 당호 사재(思齋)는 본종(本宗) 재익(載翼, 1741~1804)공이 명명한 것이며, 사재상량문(思齋上樑文)도 그가 쓴 것이나 연대 기록이 없어 정확한 때를 알 수 없다, 재익(載翼)공은 서기1784년(정조8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재직 중이었으므로 상량문을 쓸 수 있던 시기는 재익((載翼)공이 영광군수로 부임한 서기1792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서기1792년(정조16년)을 사재 건립연대로 본다. <『연안김씨문익공파지장록』 건권 사재상량문 및 사재기(思齋記) 참조>
직강공파나산종중이 호남지방 명문가로서 지역유림의 구심점이 되었고, 또한 그 지역 자제들을 교육하는 서재가 이미 갖추어져있었으므로 사우(祠宇)가 건립되는 것은 그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볼 때 자연스런 일이라 하겠다. 호남일대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삼현사(三賢祠)에 나복산인(蘿葍山人)공과 그 두 아들 문정공(文靖公), 문익공(文翼公)의 위패를 모심으로써 사우와 서재를 갖춘 서원이 설립된 것이다. 삼현사상량문(三賢祠上樑文) 말미 ‘崇禎紀後四丁亥後孫䥧撰謹(숭정기후사정해후손선찬근)’의 기록으로 볼 때 삼현사는 서기1827년(순조27년)에 건립되었으며, 상량문은 내자시윤공파도일리종중 선(䥧, 1770∼1833)공이 저술한 것을 알 수 있다.<연안김씨대동보 정묘보 205쪽, 병술보 274쪽 참조> 『연안김씨약사』에는 삼현사 건립연대를 서기1767년(영조43년)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선(䥧)공의 삼현사상량문 ‘崇禎紀後四丁亥(숭정기후사정해)’를 잘못 기산(起算)한 것이다. 서기1767년은 숭정기후3정해(崇禎紀後三丁亥)이며 더구나 선(䥧)공은 서기1770년에 출생한 분이다.

2. 서원(書院)의 훼철과 삼현사유허비(三賢祠遺墟碑)

  1) 삼현사 훼철과 유허비 건립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증설되어감에 따라 혈연, 지연, 학벌, 당파관계로 연결되어 지방양반층의 이익집단으로 변모되고, 사액서원(賜額書院)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국고 수입을 감퇴시켰으며, 유생은 관학(官學)인 향교(鄕校)를 외면하고 서원에 들어가 붕당(朋黨)을 이루어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켰다.
서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꾸준히 있었으나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손을 대지 못하고 전국에 1,000여개가 난립하고 있었다. 고종의 즉위로 집권한 대원군(大院君)은 서기1865년(고종2년) 그 당시 폐해가 가장 극심했던 만동묘(萬東廟)를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드디어 서기1868년에는 서원의 모든 특권을 철폐하고 미사액서원(未賜額書院)을 훼철하도록 하였고, 서기1871년에는 사액서원 중에서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원매주(撤院埋主)하도록 하였다. 삼현사도 1868년에 훼철(毁撤)되어 빈터만 남게 되었다.
후손들이 서원은 훼철(毁撤)되었지만 빈터에 유허비라도 건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서기1893년 사준(思濬)공이 유허비 건립 취지를 경향제종(京鄕諸宗)에게 알려 드디어 서기1906년 삼현사유허비를 세우게 되었다. 유허비 건립에 주도적으로 관여한 분들의 이름이 비문 말미에 새겨져 있으니 모두 31명이다.

  2) 삼현사 서재(書齋)의 복원 

그 후 서기1915년 나산종중 종인들은 유허(遺墟)에 서재(書齋)를 다시 세우고 모현재(慕賢齋)라 이름하였다. 모현재는 당호(堂號)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 모셨던 삼현을 그리워하는 후손들의 마음이 담겨있는 곳이다. 건립초기에는 지역 청소년의 교육을 위한 서재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퇴락하여 찾는 이가 없다. 그러나 직강공파나산종중에서는 지금까지 삼현사유허를 정성껏 다듬고 가꾸고 있으며, 허물어져가는 모현재를 2011년 6월 중건(重建)하여 후손들에게 옛 영화를 잊지 않고 오늘을 슬기로 살아가게 하는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다. 모현재를 중수할 때 확인한 옛 건물의 상량문 “海龍, 歲在乙卯三月二十一日乙未竪柱, 翌日丙申酉時上樑, 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 洛龜”에서 건립연대를 알 수 있다. 

 


Ⅱ. 삼현사유허비문(三賢祠遺墟碑文)의 출전과 국역


삼현사유허비문은 1987년 발행『연안김씨정묘대동보(延安金氏丁卯大同譜)』, 2006년 발행『연안김씨병술대동보(延安金氏丙戌大同譜)』와 1936년 발행『연안김씨문익공파지장록(延安金氏文翼公派誌狀錄)』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1998년 담양문화원 발행『국역창주집(國譯滄州集)』에는 비문과 국역이 같이 수록되어 있으며, 2001년 발행 연안김씨약사(延安金氏略史)』에 『국역창주집』의 국역문(國譯文)을 이록(移錄)하여 소개하고 있다.
정묘보(丁卯譜)와 병술보(丙戌譜)에 수록된 유허비문은 원문이 아니고 유허비 건립 2년 전에 작성한 초본(草本)으로 실제 비문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논외로 한다.<정묘보 236쪽, 병술보 316쪽 참조>
『연안김씨문익공파지장록』은 서기1936년에 발행한『연안김씨문익공파보(延安金氏文翼公派譜)』 부록문헌(附錄文獻)으로 삼현사유허비문외에 나산삼현사상량문(蘿山三賢祠上樑文), 삼현사통문(三賢祠通文), 사재기(思齋記), 사재상량문(思齋上樑文) 등이 수록되어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다만 연안김씨문익공파지장록』에 수록된 유허비문은 원문과 달리 글자가 추가되거나, 바뀌거나, 삭제된 부분이 있다. 유허비 원문과 다른 부분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위 내용을 살펴보면 유허비 원문의 어법이나 내용에 큰 오류가 없다. 오히려 지장록의 비문에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살펴보아도 유허비 원문에 크게 문제될만한 오자나 탈자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어떤 경위로 위와 같이 일부 글자들이 바뀌어 문익공파지장록에 수록되었는지는 상고(詳考)할 수는 없으나 위와 같은 내용을 살펴서 읽어야 할 것이다.
서기1998년 담양문화원(潭陽文化院)에서 발행한『국역창주집(國譯滄州集)』은 연안김씨대종회와 광주지역종친들의 노력으로 담양문화원에서 발행한 향토사료집(鄕土史料集)으로 문익공의 상소문(上疏文), 서(書), 계자서서(戒子婿書) 등의 저술(著述)과 공의 행장(行狀), 신도비명(神道碑銘) 그리고 삼현사 관련문헌 등을 국역하여 원문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국역창주집(國譯滄州集)』의 유허비 원문은『 연안김씨문익공파지장록』을 이록(移錄)한 것으로 그 내용도 지장록과 같다. 

 


Ⅲ. 삼현사유허비문(三賢祠遺墟碑文) 

아래는 유허비를 직접 답사하여 비문을 일일이 옮겨 적은 것이다. 또한 구두점을 찍어 문의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어려운 글자나 단어는 각주(脚註)를 달았다. 역해(譯解)는 원문에 충실하되 시조 박사공(博士公) 이하 선조, 특히 나복산인(蘿葍山人)공의 행적에 어긋나지 않게 일부를 고쳐 역해했음을 밝혀둔다. 또한 국역창주집의 국역문을 기초로 하여 가급적 근접한 역해가 되도록 노력하였다.

1. 삼현사유허비문(三賢祠遺墟碑文)

三賢祠遺墟碑
昌平縣之蘿山舊有三賢祠, 寔我先祖蘿葍山人諱濤, 幷其二子, 文靖公諱自知, 文翼公諱汝知, 三先生俎豆之所。蘿葍山在松京之南, 先生居而號之。此非先生之舊而必院於是者, 盖因山名之偶同, 而士林之所高景, 益見其德義之入人深也。
我金氏延安人, 四門博士諱暹漢, 大將軍諱俊麟, 版圖判書諱景成, 贊成贈大匡諱祐, 直提學諱光厚, 考以上五世世顯達。先生生于麗季, 恭愍王壬寅以進士登文科, 授左正言, 洪武庚戌選貢士, 入中國, 授同進士東昌府邱縣丞, 賜甲第米絹以寵之, 留仕二年, 親老乞養, 詔還本國, 恭愍手書金濤長源蘿葍山人八字, 賜之, 且曰, 蒙被天寵, 使天下知我國有人, 授右司諫, 應敎, 司藝, 司議, 代言, 特陞知申事, 密直提學, 事載麗史。文靖文翼同師圃隱, 兼趨庭訓, 皆功存名敎。文靖號逸溪, 文翼號滄州。湖南士林本土後承, 追慕嘉惠, 建院而腏享焉。
當宁戊辰大同撤院, 今爲三十九年。古逕餘竹, 滿庭荒草, 雖尋常行路指點興歎, 况其雲仍乎。癸巳冬余分憂南州, 祠址居宗壽淵思英, 言遺墟建碑有不容緩, 余聞之, 蹶然而起, 慨然而歎曰, 水不忍廢, 地不忍荒, 顔樂不可以復亭, 則以一片石庸表存羊之義, 或將爲竢後可復之兆朕耶。乃發書於湖洛諸宗, 屢伸而石旣具。屬余記其事, 余於始事之日不敢曰不知, 亦不敢以不文辭也。謹述其顚末而俾鐫于石, 聖山蒼蒼, 樂湖泱泱, 先生之風山高水長, 數尺貞珉曷足以表其萬一也哉。
十七代孫 資憲大夫前議政府贊政 思濬 撰。
通政大夫前牧使 甲秀 篆。
正憲大夫前吏曹判書 世基 書。
崇禎後五丙午 五月 日 京有司 參奉 春基 立。
掌財 弼秀。收錢 思鐘。監董 思淳。
秉秀, 判書 思衡, 安秀, 思鶴, 寬基, 學秀, 參奉 思駿, 亮基, 思仁, 玉基, 思堯, 都事 鼎基, 喆秀, 琪淵, 德基, 思謙, 參領 思億, 文基, 思哲, 思說, 必秀, 思曾, 思南, 鎭基。

2. 삼현사유허비문(三賢祠遺墟碑文) 역해

삼현사유허비
옛날 창평현(昌平縣) 나산(蘿山)에 삼현사(三賢祠)가 있었으니, 이곳은 우리 선조로 휘(諱)가 도(濤)인 나복산인(蘿葍山人)과 함께 그 두 아들 휘가 자지(自知)인 문정공(文靖公)과 휘가 여지(汝知)인 문익공(文翼公) 세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나복산(蘿葍山)은 고려의 서울인 개성(開城) 남쪽에 있는 산으로 선생께서 거주하며 산 이름으로 아호(雅號)를 삼았다. 이곳은 선생의 옛터가 아니나 필시 여기에 서원이 세워진 것은 산 이름이 우연히 같고, 사림(士林)들이 높이 받들던 바이며, 더 살펴보면 그 학덕과 의리가 사람들에게 깊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우리김씨의 관향은 연안(延安)으로 시조 사문박사(四門博士)는 휘(諱)가 섬한(暹漢)이고, 대장군(大將軍)은 휘가 준린(俊麟)이고, 판도판서(版圖判書)는 휘가 경성(景成)이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대광(大匡)에 증직된 분은 휘가 우(祐)이고, 밀직제학(密直提學)은 휘가 광후(光厚)이니 아버지이상 5대가 대대로 현달하였다. 선생은 고려말기에 태어나 공민왕 임인년(서기1362년)에 진사(進士)로 문과에 올라 좌정언(左正言)에 제수되었고, 홍무경술년(서기1370년)에 공사(貢士)로 선발되어 명나라에 들어가 과거(科擧)에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구현승(邱縣丞)에 제수되고 큰집과 쌀과 비단을 하사받는 총애를 받으며 2년간 벼슬길에 머물다, 어버이가 늙어 봉양할 것을 청하여 황제의 명으로 환국하니 공민왕이 ‘김도장원나복산인(金濤長源蘿葍山人)’ 여덟 자를 손수 써 하사하고, 또 말하기를 “중국황제의 총애를 입었으니 우리나라에도 인물이 있음을 천하에 알렸다” 하였다. 우사간(右司諫), 응교(應敎), 사예(司藝), 사의(司議), 대언(代言)를 거쳐 특별히 지신사(知申事)에 승진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으니 이런 일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문정공(文靖公)과 문익공(文翼公)은 함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스승으로 모셨고 아울러 어버이의 훈육(訓育)을 받으니, 모든 공적은 유학(儒學)의 가르침을 간직함에 있었다. 문정공의 아호는 일계(逸溪)이고, 문익공의 아호는 창주(滄州)이다. 호남지방의 선비들과 이 지방의 후손들이 선생의 아름다운 얼을 추모하여 서원(書院)을 세우고 배향(配享)하였다.
지금 임금 무진년(서기1868년)에 크게 한가지로 서원이 훼철(毁撤)된 후 이제 39년이 되었다. 옛길에 대나무는 남아있는데 뜰에는 잡초만 가득하니 비록 무심히 길 가는 사람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탄식하는데 하물며 그 후손들은 어떠하랴! 계사년(서기1893년) 겨울에 내가 호남의 수령으로 부임하였는데 서원이 있던 마을에 사는 종친 수연(壽淵)과 사영(思英)이 유허에 비석을 세우는 일을 더 늦출 수 없다고 말하거늘 내가 듣고 궐연히 일어나 개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우물은 차마 폐할 수 없고 땅은 차마 황폐하게 할 수 없으니, 서원은 다시 세울 수 없다면 한 조각의 돌에라도 존양지의(存羊之義)를 떳떳이 표시하는 것이 혹 장차 후일을 기다려 복원할 수 있는 조짐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호남과 서울의 종친들에게 서신을 보내고 누차 뜻을 펴서 빗돌이 이미 갖추어 졌다. 이 일을 기록하는 것을 나에게 위촉하거늘 나는 일이 시작될 때에 감히 맡지 못한다고 말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문장력이 없다는 것으로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 삼가 이 일의 전말을 서술하여 빗돌에 새기게 하나 성산(聖山)이 푸르고 푸르듯, 낙호(樂湖)가 깊고 넓듯 선생의 유풍(遺風)은 산같이 높고 물같이 장원(長遠)한데 몇 자되는 빗돌로 어찌 그 만분의 일라도 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십칠대손 자헌대부 전의정부찬정 사준(思濬) 찬.
통정대부 전목사 갑수(甲秀) 전.
정헌대부 전이조판서 세기(世基) 서.
숭정후오병오(崇禎後五丙午) 오월 일 경유사(京有司) 참봉 춘기(春基) 입.
장재(掌財) 필수(弼秀). 수전(收錢) 사종(思鐘). 감동(監董) 사순(思淳).
병수(秉秀), 판서(判書) 사형(思衡), 안수(安秀), 사학(思鶴), 관기(寬基), 학수(學秀), 참봉(參奉) 사준(思駿), 양기(亮基), 사인(思仁), 옥기(玉基), 사요(思堯), 도사(都事) 정기(鼎基), 철수(喆秀), 기연(琪淵), 덕기(德基), 사겸(思謙), 참령(參領) 사억(思億), 문기(文基), 사철(思哲), 사열(思說), 필수(必秀), 사증(思曾), 사남(思南), 진기(鎭基).

< 참고자료> 삼현사유허비문

 

 

리스트

『顔樂堂集』과 延安金氏의 淵源
을유보 편수경위 고찰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