族譜硏究資料




을유보 편수경위 고찰 ①
작성자 : 김수영 작성일 : 2017-09-15 16:02:44       조회수 : 951 파일 :

『을유보서(乙酉譜序)』 분석(分析)을 통한 편수경위(編修經緯) 고찰(考察)①

延安金氏大宗會顯彰硏究委員會
硏究委員 博士公25世孫 壽泳(直講公派羅山宗中) 


 

목 차

Ⅰ. 서론(序論)
Ⅱ. 을유보서(乙酉譜序)의 분석(分析)
  1. 시조 박사공(博士公)의 선계(先系)
  2. 선조들의 현달(顯達)과 가문의 융성
  3. 연흥가(延興家)의 참화와 지추공(知樞公)의 세보편찬
  4. 통덕랑공(通德郞公)의 을유보(乙酉譜) 중수
  5. 족보의 중요성과 양공(兩公)의 업적
Ⅲ. 을유보(乙酉譜)를 편수한 통덕랑공(通德郞公)은 누구인가?
  1. 을유보서(乙酉譜序)를 지은 재구(載久)공의 세계(世系)
  2. 통덕랑 재문(載文)공이 을유보를 편수하다
Ⅳ. 을유보(乙酉譜)의 편수경위와 을유보서(乙酉譜序)
  1. 서(序)ㆍ발(跋)없이 간행된 을유보(乙酉譜)
  2. 을유보 간행 26년 후 지은 을유보서(乙酉譜序)
  3. 재구(載久)공의 을유보 편수설(編修說)에 대한 재고(再考)
Ⅴ. 제언(提言)



Ⅰ. 서론(序論)

우리 연안김씨가 처음으로 발간한 대동보는 1719년에 간행한 기해보(己亥譜)이다. 그 후 46년이 지나 1765년에 두 번째 대동보(大同譜)인 을유보(乙酉譜)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을유보는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이 없어 편수ㆍ간행 경위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1870년에 간행한 세 번째 대동보인 경오보(庚午譜)에 을유보서(乙酉譜序)가 실려 있는 것이다. 서문 말미에 "숭정후삼신해전왕손교부재구찬(崇禎後三辛亥前王孫敎傅載久撰)"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서문은 1791년에 연안부사 재구(載久)공이 쓴 것을 알 수 있다. 을유보 간행 26년 후인 1791년에 재구공이 을유보서(乙酉譜序)를 찬(撰)하였고, 그 서문이 1870년에 간행한 경오보(庚午譜)에 실려 있는 것이다.

한편 1982년에 발행한 연안김씨세사(延安金氏世史) 제1집의 편보사(編譜史)에 을유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을유보
간행연대 : 영조41년(1765)
편 집 인 : 연안부사공, 통덕랑 휘 미상
간 행 인 : 연안부사공
권 수 : 3권(天, 地, 人)
간행전말은 다음과 같다.
1719년에 기해보가 간행 된지 46년이 되던 영조 41년에 간행된 을유보는 19세 연안부사 재구공이 간행하였다. 그가 쓴 동보 서문 중에 「종형통덕랑공(宗兄通德郞公)이 편집을 맡아 했다」고 하였는데 그 휘자가 나오지 않아 어느 분인지 알 수 없으며, 보사 경영에 대한 내력을 쓴 문헌이 없어 알 수 없다. 을유보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몇 질인지 알 수 없으며 현재 한질만을 대종회에서 보존하고 있다.


위 내용이 연안김씨세사 제1집에서 을유보를 소개하는 내용의 전부이다. 더구나 그 내용에 오류와 의문이 있다.
위 글 중에 “「종형통덕랑공(宗兄通德郞公)이 편집을 맡아 했다」고 하였는데 그 휘자가 나오지 않아 어느 분인지 알 수 없으며”라고 하였는데 종형통덕랑공(宗兄通德郞公)은 원문(原文)을 잘못 옮긴 것이다. 을유보서(乙酉譜序)에는 “오계형통덕랑공학우이불사(吾季兄通德郞公學優而不仕)”라고 기술되어 있다. ‘오계형통덕랑공(吾季兄通德郞公)’을 ‘종형통덕랑공(宗兄通德郞公)’으로 잘못 본 것이다. 서문을 지은 분의 계형(季兄)이라면 족보를 찾아보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점은 연안부사공(延安府使公, 諱 載久)이 을유보를 편집하고 간행하였다는 내용이다. 을유보가 간행된 1765년에 재구(載久)공은 불과 39세의 나이였다. 한창 학문에 전념해야 할 30대에 족보를 편집ㆍ간행하였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이러한 의문점을 풀기 위하여 을유보서(乙酉譜序)를 자세히 살펴, 을유보 편수경위를 더듬어 보고, 을유보를 편수한 분은 과연 누구인지, 왜 서문(序文)도 없이 을유보가 간행되었는지, 그리고 26년이 지난 후에 새삼스럽게 서문을 찬하였는지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을유보서(乙酉譜序)의 분석(分析)

을유보서(乙酉譜序)는 그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5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시조 박사공(博士公)의 선계(先系)
② 선조들의 현달(顯達)과 가문의 융성
③ 연흥가(延興家)의 참화와 지추공(知樞公)의 세보편찬
④ 통덕랑공(通德郞公)의 을유보(乙酉譜) 중수
⑤ 족보의 중요성과 양공(兩公)의 업적

단락별로 원문과 병술대동보에 게재된 해역을 소개하고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시조 박사공(博士公)의 선계(先系)

을유보서(乙酉譜序)의 첫머리는 시조 박사공의 선계(先系) 기술로 시작한다. 1513년 초주갑인자로 간행된 안락당집(顔樂堂集)의 세계록에 근거하여 시조 박사공의 선계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기해보의 선계 기록은 그 근거가 희박함을 지적하였다.
 

 

乙酉譜序。吾宗述古自顔樂堂始苟,非顔樂堂父子,先代之世派,列祖之名德,嗟後人于何述焉。其言曰,金氏系出新羅宗姓,初兄弟二人,以直諫流遠地,兄居北濱京,弟居豉塩城,博士公是其後孫云。顔樂去古未遠,其言必有徵,而舊譜謂,博士公以直諫謫延安,仍籍焉,不知何所據也。
<해역>
을유보서. 우리 조상의 내력을 안락당(顔樂堂)이 처음 기록하였으니 만약 안락당부자(顔樂堂父子)가 아니었다면 선대의 분파(分派)와 조상님들의 명성 그리고 유덕(遺德)을 후예(後裔)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거기에 쓰여 있기를 “김씨(金氏)는 신라의 왕성(王姓)에서 갈려 나왔다. 당초에 형제(兄弟) 두 사람이 있어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먼 지방으로 유배(流配)되었는데 형은 북빈경(北濱京)에 가서 살았고 아우는 시염성(豉塩城)에 가서 살았으니, 박사공(博士公)은 그 후손이다”라고 하였다. 안락당공(顔樂堂公)께서 그다지 오래된 분이 아니므로 반드시 증거가 있어서 한 말일 터인데 구보(舊譜)에 박사공(博士公)이 직간(直諫)을 하다가 연안(延安)으로 유적(流謫)되어서 관향(貫鄕)이 되었다는 것은 그 근거가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없다.


첫째, 우리 조상의 내력을 처음 기술한 안락당집을 소개하였다. 안락당집은 안락당 흔(訢)공의 사후에 그 아들 희락당(希樂堂) 안노(安老)공이 선고(先考)의 시문을 수집하여 역은 문집이며, 문집 말미에 희락당이 보고 들은 바와 고보서(古譜序)를 근거로 연안김씨의 선계와 자기 가문의 세계를 기록하였다.
안락당집의 세계록(世系錄)은 우리 연안김씨의 선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다만 을유보서(乙酉譜序)에서 “우리 조상의 내력을 안락당(顔樂堂)이 처음 기록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안락당집의 세계록은 안락당의 아들인 희락당 안노공이 기술한 것이다.

둘째, 시조 박사공의 선계를 기록한 안락당집의 세계록(世系錄) 내용을 소개하였다. 안락당집의 선계 기록은 대종회의 공식입장이다. 다음은 안락당집의 세계록(世系錄)이다.
 

 

延安金氏世系錄,金氏系出新羅宗姓,初兄弟二人在國直諫,忤王流遠地遂除籍,兄居北濱京,弟居豉鹽城因家焉,高句麗時冬參忽地,稱豉鹽城,後改海皐郡隸西海道,高麗改號鹽州,恭愍朝改延安府今因之,國子博士諱暹漢是其後孫,由博士公以上世遠無籍不可考
<해역>
김씨는 신라왕족에서 나왔다. 처음에 형제 두 사람이 있어 옳은 말로 왕에게 간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받아 먼 곳으로 유배되고 제적되어, 형은 북빈경에 살았고, 아우는 시염성에 살면서 한 집안을 이루었다. 시염성은 고구려 때 동삼홀 땅으로 후에 해고군으로 고쳐 부르고 서해도에 예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염주라고 불렀으며 공민왕 때 연안부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시조 국자감 사문박사 휘 섬한은 그 후손이며 박사공 이상의 세계는 아득히 멀고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다.


희락당은 세계록의 근거를 안락당집 서문(序文)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敍述)하고 있다.
 

 

오호라 선조의 덕행을 현양(顯揚)함에 내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종문(宗門)이 시조로부터 선부군(先府君)에 이르기 까지 세월이 쌓여서 세대가 아득하고 또 계적(系籍)이 없어진 채 나의 대에 와서도 증조와 고조 이상은 자세하지 못하여 일찍이 통탄함을 금치 못하던 차에 선고(先考)의 유집편찬이 이미 끝났다. 내 보고 들은 바와 고보서(古譜序)를 방증(傍證)으로 삼아 세계를 기록하여 이 유집의 말미에 붙이노라.


셋째, 기해보 범례의 선계에 대한 기록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1513년에 간행된 안락당집은 시조 박사공의 재세 년대로부터 대략 300년 후의 기록이나, 희락당은 보고 들은 바와 고보서를 방증으로 삼아 세계를 기록한다 하였으니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기해보 범례에 “고려명종시시조박사공이직간적연안잉적언(高麗明宗時始祖博士公以直諫謫延安仍籍焉)” 즉 “고려 명종 때 시조 박사공이 직간(直諫)을 하다가 연안(延安)으로 유적(流謫)되어서 관향(貫鄕)이 되었다”라 하였는바, 국자감의 정8품인 하급관리가 왕에게 직간하였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 또한 기해보에 시조 박사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好學不倦於書無不讀. 況潛聖賢之訓. 深有所得. 名震關西. 有一按察慕公. 風一見如舊. 秩滿載與還京. 遂登司馬試, 陞上舍. 明年登乙科. 第拜國子監四門博士.
< 해역>
공은 학문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현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심오한 이치를 터득한 한 바 그 이름이 관서에 떨쳤다. 그 당시 안찰사가 공을 흠모하여, 처음으로 만났을 뿐이지만 마음이 맞고 정(情)이 들어 옛날부터 사귄 벗같이 친밀(親密)하게 지내더니, 관직이 만기가 되어 상경할 때 공을 대동하고 개경으로 돌아 왔다. 마침내 사마시에 합격하여 상사에 오르고, 다음해 과거에서 을과에 합격하여 국자감 사문박사 벼슬에 올랐다.


여기서 ‘박사공의 이름이 관서(關西)에 떨쳤고, 안찰사와 함께 상경하였다‘라고 하였는바, 관서지방은 철령 서쪽지방으로 고려시대의 서북면(지금의 평안북도 일부와 평안남도)과 서해도(지금의 황해도)를 말하는 것이며, 안찰사는 도에 두던 지방관이다. 따라서 시조 박사공은 본래 서해도에 살던 사람이며, 학문으로 입신하여 중앙에 진출한 분이다.
이상 기해보의 시조 박사공에 대한 기록으로 보더라도, 동보 범례의 “왕에게 직간하다가 연안으로 유적되어 관향이 되었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연안(延安)의 토성(土姓)에서 성장한 씨족임을 세종실록지리지 연안도호부 성씨조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한국 성씨 발상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안락당집의 선계에 대한 기록은 그 타당성이 매우 높다 하겠다.

  2. 선조들의 현달(顯達)과 가문의 융성

두번째 단락은 시조 박사공이 문학으로 출신한 이래 선조들이 현달(顯達)하였음을 기술하였다.
 

 

盖博士公以文敎起關西其後若蘿葍之利賓皇朝逸溪之策名東選世爲東方詞宗。懶軒公以文雅淸謹際會靖陵位登上相有若文貞之直節批鱗暴辟有若顔樂之文章黼黻聖朝三珠聯芳爲國之光。當其時一門三中書二文衡布列貂斑出入金華者殆數十人一時搢紳士林推之爲館閣之主衣冠之右莫之敢京焉。
<해역>
무릇 박사공(博士公)이 문학(文學)으로 관서(關西)에서 출신(出身)한 이후 나복공(蘿葍公)이 황조(皇朝)에서 이름이 났고 일계공(逸溪公)의 명성(名聲)이 동선(東選)에 오름으로 해서 세상에서 동방(東方)의 문장가(文章家)라 하였다. 나헌공(懶軒公)이 문학(文學)과 청렴(淸廉)으로 중종대왕(中宗大王)을 만나 영상(領相)에 올랐고, 문정공(文貞公)의 곧은 절개(節介)는 악정(惡政)을 분쇄(粉碎)하였으며 안락당(顔樂堂)의 문장(文章)은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보익(輔翼)을 다함과 더불어 삼형제(三兄弟)의 연방(聯芳)은 나라의 빛이 되었다. 당시에 한 문중에서 3중서(中書)와 2문형(文衡)이 나왔고 금관조복(金冠朝服)으로 어전(御前)에 늘어선 자가 무려(無慮) 십수인(數十人)이라 당세에 높은 벼슬아치와 이름 있는 선비들이 관각지주(館閣之主)와 의관지우(衣冠之右)로 떠받들어 올리니 아무 부족함이 없었다.


  3. 연흥가(延興家)의 참화와 지추공(知樞公)의 세보편찬

세번째 단락은 연흥부원군가의 참화로 쇠퇴한 가문을 일으키고자 세보, 즉 우리 연안김씨 최초의 대동보인 기해보를 편수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군석(君錫)공의 공적을 기술하였다.
 

 

噫天道之有消長而人事之汚隆係焉光海俑變金鏞而延興公以母后父首罹闔門之禍滄桑易顚甹伶仃家俗無存文獻莫徵。我大宗知樞公慨然有志於敦宗綏族之義搜討遺聞草剏世譜煥然爲一家之典知樞公之有功於吾宗于顔樂尤有光焉。
<해역>
슬프도다! 천도(天道)가 고르지 못함은 인사(人事)의 성쇠(盛衰)를 좌우하는가 광해(光海)의 용변금용(俑變金鏞)으로 모후(母后)의 친부(親父)이신 연흥공(延興公)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세상(世上)이 뒤바뀌어 구렁에 전락(轉落)하니 가풍(家風)이 이어지지 않았고 문헌(文獻)이 없어진지라, 우리 대종가(大宗家)의 지중추부사공(知中樞府事公)이 개연(慨然)히 돈종목족(敦宗睦族)의 뜻을 가지고 전(傳)해지는 유사(遺事)를 두루 수소문하여 우리 가문의 전서(典書)인 찬란(燦爛)한 세보(世譜)를 만들어 냈으니 지추공(知樞公)의 우리 종문(宗門)에 남긴 공훈(功勳)은 안락당공(顔樂堂公) 보다도 더욱 빛난다 하겠다.


  4. 통덕랑공(通德郞公)의 을유보(乙酉譜) 중수

네번째 단락에서는 통덕랑공의 을유보 중수와 편수범례(編修凡禮)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 부분이 을유보의 편수경위를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伊後五十餘年之間無有能改修者吾季兄通德郞公學優而不仕讀易之暇廣搜氏族爲萬姓之譜遂就舊譜其闕略係以子。姓鼻祖公兩代配位攷據榮川宗舊傳,延城派世代誤錄還從僉知公草本,刪異姓之支蔓。限以外孫則嚴內外之別也,表後裔之隆顯各附添註則示陰隲之遠也。西派之諱字磨滅移置別譜,諸單之未可遽議姑付後錄。其所筆削修潤名有意義則通德公之能繼知樞公未卒之志者其功尤有大焉。
<해역>
그 이후 오십여년간에 능히 중수(重修)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더니 학문은 높았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고 있던 우리 계형(季兄) 통덕랑공(通德郞公)이 독서(讀書)하는 여가(餘暇)에 널리 씨족을 찾아 성보(姓譜)를 꾸미다가 드디어 구보(舊譜)를 기준으로 계속된 자손록(子孫錄)을 보완(輔完)하였다.
시조이하(始祖以下) 양대(兩代)의 배위(配位)는 영주(榮州)의 단자(單子)에 의거하였고, 구보(舊譜)의 연성파(延城派)의 세대(世代)는 잘못된 것이므로 첨지공(僉知公)의 초본(草本)에 좇아 바로 잡았고, 타성(他姓)의 넌출은 미련 없이 끊었다. 외손(外孫)과 내손(內孫)의 구별을 엄하게 하고, 외손(外孫)으로서 훌륭히 된 자는 각기 주(註)를 달아 음척(陰隲)이 먼 곳에까지 미쳤음을 표시하였다. 서파(西派)는 휘자(諱字)가 마멸(磨滅)되었으니 별보(別譜)로 옮기고, 들어온 단자(單子)가운데 가부결정(可否決定)이 되지 않은 것은 짐짓 후록(後錄)에 기록(記錄)하였다. 지추공(知樞公)이 못 다한 것을 지우고 써 보태고, 고치고 다듬어 놓았음은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뜻이었으니 그 공이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첫째, 을유보를 편수한 통덕랑공을 소개하고 있다. 을유보를 편수한 분을 ‘오계형통덕랑공(吾季兄通德郞公)’이라고 하였다. 이 부분은 뒤에서 자세히 밝히고자 한다.

둘째, 편수범례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시조이하 양대(兩代) 배위(配位)기록은 영주종가(榮州宗家)의 구전(舊傳)에 근거하였다. 시조이하 양대 즉, 박사공과 대장군공의 배위(配位)에 대한 기록은 기해보에는 없었으나 을유보에 영주종가(榮州宗家)의 구전(舊傳)에 근거하여 처음으로 기록하였다.
딸을 아들 다음에 기록하고, 외손(外孫)의 기록은 간략하게 줄였다. 조선 초기의 족보에는 아들과 딸을 출생순서대로 기록하고, 외손과 내손을 모두 기록하였으나 후기에 와서 이를 구분하는 추세였다. 기해보에는 아들딸의 구분 없이 순서대로 기록하였으나, 을유보에 와서 이를 구분한 것은 시대적 추세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성파 즉, 밀직제학공파 을진공의 계대를 지추공의 초보에 맞추어 호부원외랑공계에서 대장군공계로 옮겨 대장군 준린(俊麟)공의 2자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은 연대 상으로 맞지 않는다. 경오보에서 오류를 지적하여 기해보의 기록에 따라 수정되었다.
관서파(關西派) 즉, 호부원외랑공계(戶部員外郞公系)를 별보(別譜)로 옮겨 실었다. 관서파 중 개성부윤공파(開城府尹公派)는 기해보에 7세 신검(信劍)공까지 수록되어 있었고, 공부전서공파(工部典書公派)는 21세까지 수록되어 있었으나, 3세(世)의 휘자가 없음을 이유로 을유보에서 모두 별보(別譜)로 돌려 10세 까지만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도 경오보에서 모두 기해보에 따라 수정되었다.
타성으로 우리 족보에 등재하는 것을 단호히 배척하고, 들어온 단자 중에 가부결정이 어려운 것은 뒤에 별보로 기록하였다.

셋째, 을유보를 편수한 통덕랑공의 공을 기술하였다. “지추공(知樞公)이 못 다한 것을 지우고 써 보태고, 고치고 다듬어 놓았음은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뜻이었으니 그 공이 더욱 크다 할 것이다“라고 하여 통덕랑공이 을유보를 편수하였음을 다시 기술하고 있다.

  5. 족보의 중요성과 양공(兩公)의 업적

마지막으로 족보의 중요성을 기술하고, 기해보를 편수한 첨지중추부사공과 을유보를 편수한 통덕랑공이 우리 종문에 남긴 빛나는 업적을 기술하였다.
 

 

嗚呼自一身而爲千萬卽祖先視之己以爲所不知何人而况於相爲路人者乎。然則糾合所不知之人使相爲路人者知其爲同出於一身而不覺孝悌之油然者固不在於譜是族乎一爲譜而譜中之人皆知自路人而復歸於一身則族譜之於人又曷可少哉。然而斯譜之作亶由於二公若二公不獨有功於族人抑亦有功於祖先爲大小子何敢不記。崇禎後三辛亥 博士公十九代孫 前王孫敎傳載久撰
<해역>
오호(嗚呼)라! 당초 한 몸이 천만(千萬) 개(個)로 나누어 졌으므로 그 조상으로서도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을 것이어 늘 항차 남남으로 나누어진 당사자끼리는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러한즉 알지 못해서 서로 남이 된 사람들이 모여 본시 한 조상에서 갈려 나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효제지심(孝悌之心)이 우러나지 않는다면 그는 족보(族譜)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한 번 족보(族譜)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 남남으로부터 한 조상의 자손(子孫)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인즉 족보(族譜)가 사람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또 한 번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족보를 편수(編修)한 것이 오로지 양공(兩公)에 유연(由緣)한 것이니 이는 유독(唯獨) 종인(宗人)들에게 대하여 공(功)이 있을 뿐 아니라 한편 조상(祖上)에게 대한 공(功)이 더욱 크게 되었으니 내가 어찌 그 사실을 쓰지 않으리오.
숭정후삼신해(崇禎後三辛亥) 박사공19대손 전왕손교부재구찬(前王孫敎傳載久撰).


말미에 “숭정후삼신해(崇禎後三辛亥) 박사공 19대손 전왕손교부재구찬(前王孫敎傳載久撰)”이라는 구절을 보면 이 서문이 1791년에 연안부사 재구공이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을유보 발간 26년 후의 일이다.

(제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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