族譜硏究資料




정주(靜州) 입진성(入鎭姓) 연안김씨, 정주호장(靜州戶長) 김유간
작성자 : 김수영 작성일 : 2017-09-15 15:56:12       조회수 : 1048 파일 :

정주(靜州) 입진성(入鎭姓) 연안김씨, 정주호장(靜州戶長) 김유간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平安道) 의주목(義州牧)

동쪽은 삭주부(朔州府) 경계까지 1백 16리, 귀성부(龜城府) 경계까지 82리이고, 남쪽은 용천군(龍川郡) 경계까지 60리, 같은 군의 경계에 있는 양책관(良策館)까지 66리, 철산군(鐵山郡)경계까지 79리이고, 서쪽은 압록강(鴨綠江)까지 14리이고, 북쪽은 같은 강까지 2리이며, 서울에서는 1천 1백 86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용만현(龍灣縣)인데, 화의(和義)라고도 불렀다. 처음에는 거란(契丹)이 압록강 동쪽 기슭에 성을 두고 보주(保州)라고 일컬었고, 문종 때에 거란이 또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고 포주(抱州) 일명 파주(把州). 라고 일컬었는데, 예종 12년에 요(遼)의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도통(都統) 야율녕(耶律寧) 등과 금(金)의 군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 도망해 와서 우리 영덕성(寧德城)에 문서를 보내어 내원성(來遠城) 및 포주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속하므로 우리 군사가 그 성에 들어가서 병기ㆍ돈ㆍ곡물을 수습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의주 방어사(義州防禦使)로 고치고 남계(南界)의 인호(人戶)를 덜어다가 채워서 그제서야 다시 압록강으로 경계를 하고 관방(關防)을 두었다. 인종 4년에 금(金)이 또한 주(州)를 가지고서 귀속하였다. 고종 8년에는 반역하였으므로 낮추어서 함신(咸新)이라고 일컬었다가 곧 옛 이름으로 회복하였다. 공민왕 15년에 승격해서 목(牧)으로 하였고, 18년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어 좌정(左精)ㆍ우정(右精)ㆍ충신(忠信)ㆍ의용(義勇)의 4군(軍)을 설치하고, 각각 상천호(上千戶)ㆍ부천호(副千戶)를 두어 관장하게 하였다. 본조 태종 2년에 비로소 판관(判官)을 두고 정주(靜州)와 위원진(威遠鎭)으로 내속하고, 세조 때에 진(鎭)을 두었다.

【성씨】 본주 장(張) 안동(安東)ㆍ화녕(化寧). 최(崔) 강릉(江陵). 독고(獨孤). 정주(靜州) 윤(尹) 평산(平山). 김(金) 평산ㆍ연안(延安)ㆍ김해(金海). 조(趙) 충주(忠州). 인산(麟山) 이(李)ㆍ유(柳) 모두 밀성(密城). 서(徐) 충주. 최(崔) 해주(海州). 영주(靈州) 김(金) 용강(龍岡). 위원(威遠) 백(白) 백주(白州). 임(任)ㆍ유(柳)ㆍ노(盧) 모두 풍주(豐州). 서(徐) 광양(光陽). 정융(定戎) 조(趙)ㆍ김(金) 안악(安岳). 임(任) 충주. 이(李) 안동ㆍ옹진(甕津). 고(高) 삼화(三和). 영덕(寧德) 김(金) 은률(殷栗). 임(林) 구현(丘縣). 양(楊) 당악(唐岳). 영삭(寧朔) 김(金)ㆍ강(康) 모두 장연(長淵). 오(吳) 해주.

【산천】 송산(松山) 주에서 동으로 30리 떨어져 있는 진산이다. 미라산(彌羅山) 주에서 남으로 1백 리 떨어져 있다. 본래는 용천군의 땅이었는데, 성화(成化) 12년에 갈라 주에 붙였다. 어전(魚箭 고기 잡는 기구, 통발)이 2군데 있는데, 하나는 용천군 사자도(獅子島)의 남쪽에, 하나는 북쪽에 있다. 염분(鹽盆)이 2군데 있다. 백마산(白馬山) 주에서 남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흰 용마(龍馬)가 나와서 논 까닭에 이름지었다고 한다. 마두산(馬頭山) 주에서 남으로 80리 떨어져 있다. 화엄산(華嚴山)ㆍ천마산(天磨山) 모두 고정녕(古定寧)의 북쪽에 있는데, 주에서 1백 50리 떨어져 있다. 천마산은 삭주(朔州)에 또 나온다. 판막현(板幕峴) 주에서 동북으로 1백 16리 떨어져 있다. 가두등현(加豆等峴) 주에서 동으로 50리 떨어져 있다. 진병곶(鎭兵串) 주에서 남으로 50리 떨어져 있다. 바다 주의 남쪽에 있다.
구룡연(九龍淵) 주에서 북으로 8리 떨어져 있다. 못의 남쪽에 토성(土城) 터가 있는데, 둘레가 6백 척이다. 민간에 전하기를, 합단(哈丹)ㆍ지단(指丹) 형제 중 한 사람은 못 위에 있는 토성에 살고 있으며, 한 사람은 주성(州城) 안에 살고 있는데, 정주 호장(戶長) 김유간(金裕幹)이 꾀로써 쫓아내려고 거짓말로, “우리나라가 어느 날 밤에 너희들을 섬멸하려고 한다.” 하고, 그 밤에 이르러 산 위에 횃불을 많이 설치해 놓고서 보게 하였더니, 합단 등이 그럴 듯하다 하여 곧 성을 비우고 강을 건너 도망하였다. 그러나 강 위에는 타고 건너갈 배가 없었으므로 김유간이 마음에 이상히 여겨 자세히 보니 강 북쪽 근변에 철우(鐵牛)를 잠겨[沈] 세우고 또 쇠사슬로 남쪽 강가의 바윗돌 사이에 고정시키니 그 소의 등[背]을 부교(浮橋)로 삼아 건너는 것이었다. 김유간이 곧 다리를 파괴하여 다시 건너오지 못하도록 하였고, 영락(永樂) 무자년에 주성(州城)을 쌓을 때에 헤엄 잘 치는 사람을 시켜 쇠사슬을 건져서 성문(城門)의 자물쇠[鎖鑰]를 만들고, 그 철우는 못의 모래 속으로 침몰되었으므로 다시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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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김씨의 한 갈래는 고려시대부터 의주지방으로 옮겨 살았다
“延安金氏四門博士 暹漢의 上系文獻에 대한 尋究”에 대한 소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