族譜硏究資料




안락당집 초간본을 찾다.
작성자 : 延松齋 작성일 : 2017-09-15 15:52:54       조회수 : 923 파일 :

안락당집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 초간본을 찾다.

博士公25世孫 壽泳(直講公派羅山宗中) 


「안락당집(顔樂堂集)」

「안락당집(顔樂堂集)」은 안락당(顔樂堂) 김흔(金訢)의 사후 20여 년이 지난 1513년(중종8년)에 아들 안노(安老)공이 아버지 안락당의 시문을 수습(收拾) 편집(編輯)한 것으로, 2책 4권으로서 건책(乾冊)인 권1은 시(詩), 권2는 잡저(雜著), 곤책(坤冊)인 권3과 권4는 부록(附錄)으로 세계, 연보, 유행기록 등으로 되어있다.

안락당집은 서강대학교도서관에 건책(乾冊)인 제1권 및 제2권이 소장되어 있으나 낙장(落張) 또는 일부가 파손(破損)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충남대학교중앙도서관에 곤책(坤冊)인 제3권 및 제4권이 소장되어 있다.
본 문집은 권미(卷尾)에 1514년에 쓴 김안국(金安國)의 발(跋)과 ‘奉正大夫行郡守 權五紀 皇明正德丙子孟秋 榮川郡 開刊’이란 간기(刊記)가 있어 이 책이 1516년에 간행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필사본 1질과 1905년에 중간한 활자본 1질을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1516년 영천군 개간 목판본이 안락당집 초간본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본은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 번각본(飜刻本)으로 밝혀졌다.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 활자본

그렇다면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 활자본이 따로 있어야한다. 서지학계의 권위자이신 고 김두종 박사의 <한국고인쇄기술사>에 보면 갑인자로 간행된 문집으로 <안락당집> 4권이 중종조에 간행되어 `화산서림구장본`으로 전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화산서림(華山書林)이란 고 이성의씨가 일제시대부터 운영해온 고서점으로, 고 이성의씨는 고전자료에 대한 안목이 높고 경험이 풍부한 분이다. 그는 고서사(古書肆)의 경영이 생업이었지만, 결코 상리(商利)에만 집착하지 않고 우리의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을 소중하게 여겨 초간(初刊) 또는 선본(善本)과 오래된 희귀본(稀貴本)이라면 별도로 간직하여 소중하게 보관했다. 그러 던 중 1965년 6월 졸지에 타계하였는데, 그 뒤 문고본의 일부가 Columbia대학으로 반출되었고, 나머지는 고려대학교도서관(高麗大學校圖書館)으로 기증되었다.

이때 화산서림에 소장되어오던 안락당집 초간본인 갑인자본도 고려대학교도서관으로 기증되었다.
현재 고려대학교도서관에 곤책인 권3지4(卷三之四)가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중요부분인 건책이 낙질(落帙)되어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서 명 : 안락당집(顔樂堂集)
장 르 : 고서
형 태 : 零本1冊, 四周單邊 半廓 25.2×17.2cm, 有界, 10行17字 小字雙行, 內向花紋魚尾
크 기 : 31.2 ×20.6 cm
저 자 : 金訢(朝鮮), 金安老(朝鮮) 編
판사항 : 甲寅字
간사지 : 刊寫地未詳
간사자 : 刊寫者未詳
간사년 : 中宗9년(1514)
분 류 : 화산 貴140 2
소장위치 : 고려대학교 도서관

이와 같이 안락당집 초간본은 1514년(중종9년)에 금속활자인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간행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초간본으로 알고 있던 영천군개간 목판본은 1516년 영천군수 권오기(權五紀)공이 초주갑인자본을 번각하여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세종 때 만든 금속활자인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는 주로 사서나 경서를 찍었고 문집을 인출한 것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이정(1454~1488)의 시문을 모은 문집을 성종의 지시로 1489년 인쇄된 풍월정집이 있는데, 1514년에 안락당집을 초주갑인자로 간행했다는 사실 그리고 간행 2년 후 영천군수 권오기(權五紀)공이 번각하여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안락당집이 얼마나 귀중본으로 꼽히던 책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연안김씨의 연원을 밝힌 최고(最古)의 문헌이라는 점에서 우리 연김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값진 것이다

화산문고본 안락당집 건책은 어디로 갔는가

화산서림(華山書林)을 경영하던 이성의(李聖儀)가 1965년 6월 졸지에 타계하였는데, 그 뒤 가족들이 그 문고본의 처리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를 미국에 있는 한국학관계 대학으로 처분할 것을 논의하고 민원서를 문교부에 제출했다.
이를 접수한 문교부는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위원회로 하여금 그 여부를 심사하도록 지시했고, 그에 따라 학계 각 분야의 인사 10명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심사하였다. 그 결과 인조 14년(1636)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 이전의 전적(典籍)은 희관본(稀觀本) 또는 귀중본(貴重本)에 해당되므로 국외반출이 불가능하고 그 이후의 간인본(刊印本)과 필사본(筆寫本)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 문고본의 일부가 Columbia대학으로 반출되었으나 그 종수와 내용에 대해서는 파악이 될 수 없었다. 몇 해가 흐른 1972년에 그 문고본의 나머지 전부가 고려대학교도서관(高麗大學校圖書館)으로 기증되었는데, 이 때 그 목록을 보고 비로소 Columbia C.V.Starr East Asian Library으로 반출된 장서의 규모와 성격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될 수 있었다.

1) 컬럼비아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의 화산문고본
컬럼비아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의 화산문고본은 총 517종 1,857책의 고전자료로 일제시대부터 화산서림을 경영한 이성의 씨가 수집한 문고본의 일부로, 주로 조선 후기의 귀중한 활자본을 뜻한다.
현재 C.V.Starr East Asian Library에는 이성의(李聖儀) 화산문고본(華山文庫本)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1930년대에 수집하여 그간 정리해온 책 중에서 가려낸 선본(善本)을 비롯하여 1968년 인사동(仁寺洞) 고서사에서 구입해온 고서와 하바드대학 Yenching도서관에서 구입한 복본고서(複本古書)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총수는 662종 2,235책에 이른다. 이것은 경부(經部) 52종 198책, 사부(史部) 230종 651책, 자부(子部)72종 192책, 집부(集部) 308종 1,197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판종별로 구분하면 활자본(活子本) 604종, 목판본(木子本)46종, 필사본(筆寫本) 12종에 이르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특히 15세기에 발행된 2권의 용비어천가는 도서관이 자랑하는 귀중본 목록 중 하나이며, 초주갑인자 소장본은 중종-명종 연간에 찍은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 후집(後集) 제 4-5권 1책이 있다

2) 인사동의 다른 고서사(古書肆)로 흘러나온 화산문고본(華山文庫本)
컬럼비아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의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에 인출된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 갑진자본(甲辰字本), 병자자본(丙子子本)이 약간 들어 있는데, 이것은 인사동의 다른 고서사(古書肆)로 흘러나온 화산문고본(華山文庫本)을 1968년에 별도로 구입해 온 것이 라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화산서림구장본은 일부가 다른 고사서로 흘러나왔음을 알 수 있다.

3) 고려대학교도서관(高麗大學校圖書館) 화산문고본
1972년에 화산서림구장본의 나머지 전부가 고려대학교도서관(高麗大學校圖書館)으로 기증되었다.
안락당집도 이 때 고려대학교도서관으로 기증되었는데, 현재 고려대학교도서관에 소장된 화산문고본은 안락당집은 곤책(권삼지사) 뿐이다.
화산서림구장본 안락당집 건책은 어디로 갔는가. 컬럼비아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도 없고, 고려대학교도서관에도 없다. 아마 다른 고사서로 흘러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통문관에 소장된 안락당집 건책

화산문고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통문관에 “안락당집” 고판본 건책이 소장되어 있다.

건국대학교 김일근 교수는 안락당집을 찾아내고 연구하여 수편의 논문을 발표한바 있으며, 안락당집과 희락당고를 합집으로 영인 출판한 바 있다.
이러한 김교수의 연구논문에 대하여 반론을 펴온 이병주 교수의 “김흔의 번역두시서에 대한 재론”이란 글 중에 “통문관주 이겸노씨 소장인 고판본 안락당집 건책을 제시하면서 대략 다음과 같이 실증한 줄로 안다. 1) 김흔의 번역두시서(이하 약칭 “김서”)가 실린 안락당집은 필자가 언급한 바대로(상게 연구발표 시와 소론 발표 시는 1905년 활판본만 김교수에게서 전독했고, 그 뒤 국립도서관 소장 정덕판 곤책만 참고했음) 家傳의 手草를 모은 補遺本이다. 그 증명으로 이 정덕 고판본 “안락당집”은 남곤의 서(3장)와 강혼의 서(2장), 다음 장이 ‘안락당집보유‘이고, 그 다음 장이 권지일임을 명시하였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통문관에 “안락당집” 고판본 건책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초주갑인자본인지 번각본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인사동의 다른 고서사(古書肆)로 흘러나온 화산문고본(華山文庫本)이 있었다고 하는데, 화산서림구장본 안락당집 건책이 이러한 경로로 흘러 나왔는지, 그리고 통문관에서는 어떠한 경로로 안락당집 고판본 건책을 소장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종회 사균부회장님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통문관 이겸노옹이 타계하신 뒤 문고를 개방하지 않고 있어 안락당집 소장여부 나아가 초주갑인자본인지의 여부도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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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김흔(金訢) : 1448(세종 30)∼1487(성종 18).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군절(君節), 호는 안락당(顔樂堂)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우신(金友臣)의 아들이며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수학(修學)했다.
세조 14년(1468)에 진사시(進士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성종 2년(1471)에는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한 다음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이어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성종(成宗) 10년(1479)에는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으로 들어가다가 도중에 병을 얻어 대마도(對馬島)에서 돌아왔다. 또 질정관(質正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 전한(典翰)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되고 다시 공조 참의(工曹參議)가 되었다.
신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할 것을 상소하였다. 인격이 뛰어나고 학문이 높았으며 문장도 뛰어났는데 특히 율시(律詩)에 능하였다. 저서로 《안락당집(顔樂堂集)》이 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 : 1434년(세종 16) 갑인년에 주자소(鑄字所)에서 만든 동활자.
번각본(飜刻本) : 활자본인 원본을 목판에 뒤집어 붙여 새긴 뒤 먹으로 찍어낸 것.
출간일시와 장소를 표시하는 간기만 새롭게 바꾸어서 새겼다. 따라서 활자본 원본은 사라지고 여러 권의 목판본으로 유통되었다. 일반인들은 간혹 번각본을 원본으로 오인하는데 중간의 물고기 문양, 활자 간격 등을 살펴보면 구별된다.
권오기(權五紀, 1463~?) : 본관 예천. 자 협지(協之). 호 졸재(拙齋).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봉교(奉敎)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직하여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동생 오복(五福)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祭文)을 실어 극형을 당하자 이에 연루되어 해남으로 귀양갔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1511년(중종 6) 지평(持平), 1526년 경상좌도 군적경차관(軍籍敬差官)이 되었으며, 1530년 사도시부정(司도寺副正)을 거쳐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졸재집(拙齋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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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安金氏四門博士 暹漢의 上系文獻에 대한 尋究”에 대한 소견
增補文獻備考氏族編 延安金氏와 有關條에 杜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