族譜硏究資料




을유보를 편집하신 통덕랑공은 누구인가
작성자 : 延松齋 작성일 : 2017-09-15 15:48:14       조회수 : 973 파일 :

을유보를 편집하신 통덕랑공은 누구인가

직강공파 나산종중 수영

을유보(乙酉譜)는 1765년에 간행된 연안김씨의 두번째 대동보(大同譜)입니다.
그러나 을유보는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이 없어 편집경위를 자세히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후 1870년 세번째로 간행한 경오보(庚午譜)에 을유보 서문이 실려있는데 "숭정후삼신해 왕손교부재구찬(崇禎後三辛亥 王孫敎傅載久撰)"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서문이 서기 1791년에 재구(載久)공이 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을유보 간행당시에는 서문 없이 간행하였던 것을, 26년 후인 1791년에 재구공이 서문을 찬(撰)하셨고, 그 서문을 경오보에 실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서문에 "우리 계형(季兄) 통덕랑공(通德郞公)이 학문은 높았으나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았는데, 독서하는 여가에 널리 씨족을 찾아 성보를 꾸미다가 드디어 구보(舊譜)를 기준으로 계속된 자손록(子孫錄)을 보완 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을유보의 편집경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을유보를 편집하신 "계형통덕랑공"은 누구인가.
을유보를 발간한 내자시윤공파 파주종중(坡州宗中), 을유보 서문을 지으신 재구공의 가계를 살펴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자시윤공파 김형(金炯)공의 아드님은 다음과 같습니다(을유보)
재대(載大) : 갑신생(甲申生) 무오진사(戊午進士) 금현감(今縣監)
재천(載天) : 정해생(丁亥生) 계미(癸未) 인일제장원(人日製壯元), 전정언(前正言)
재문(載文) : 출계(出繼) 숙(火肅)
재구(載久) : 병오생(丙午生) 기묘진사(己卯進士) 전왕손교부(前王孫敎傅)
재인(載人) : 을묘생(乙卯生) 계미증광문과(癸未增廣文科) 금승문부정자(今承文副正字)
재혁(載奕) : 무오생(戊午生)
재영(載靈) : 임자생(壬子生)

재구공에게는 백형, 중형, 계형 세분의 형님이 계십니다.

첫째, 재대공은 재구공의 백형으로 그 당시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재천공은 재구공의 중형(仲兄)으로 1763년 인일제에 장원하여 직부전시하셨고, 그해 사간원 정언을 지내셨던 분입니다. 을유보 간행당시는 정언을 역임했었으며, 그후 재구공이 서문을 편찬하신 신해년(1791)으로 볼 때는 사헌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통덕랑공(通德郞公)이란 호칭은 맞지않습니다.

재천공과 관련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소개합니다

영조 39년( 1763 계미) 1월 2일 인일제를 행하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를 행하여 서울과 시골에서 각각 한 사람을 뽑았는데, 김재천(金載天)·현영조(玄永祚)는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고 나머지에게는 각각 급분(給分)하였다.

영조 39년(1763 계미) 12월 20일 도정을 행하다. 이성원·구선행·이성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임금이 친히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성원(李性源)을 수찬으로, 구선행(具善行)을 판윤으로, 이성수(李性遂)를 사서로, 조돈(趙暾)을 대사헌으로, 원의손(元義孫)을 집의로, 유사흠(柳思欽)을 사간으로, 이현옥(李鉉玉)을 장령으로, 이해진(李海鎭)을 지평으로, 이득복(李得福)·김재천(金載天)을 정언으로, 홍낙명(洪樂命)·서명선(徐命善)을 교리로, 이성원(李性源)·김귀주(金龜柱)를 부교리로, 김익(金熤)을 부수찬으로, 황채(黃寀)를 경상 좌수사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윤급(尹汲), 병조 판서 이창수(李昌壽)의 정사(政事)였다.

【註】김익(金熤,1723~1790) : 연안김씨 18세(世), 내자시윤공파 약현종중 판돈령부사 김상석(金相奭)의 아들. 자 광중(光仲), 호 죽하(竹下) 또는 약현(藥峴), 시호 문정(文貞). 1763년(영조 3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왕이 인원왕후(仁元王后: 肅宗繼妃)의 제삿날을 전후해서 매일같이 불공을 올리는 것에 반대하여 갑산에 유배되었다. 풀려나온 뒤 응교(應敎) 등을 거쳐 1778년(정조 2) 대사헌이 되고, 1780년 예조판서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82년 우의정에 오르고, 1786년 다시 동지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789년 영의정이 되었다.


영조 40년(1764 갑신) 7월 27일 정언 김재천·정언 김용이 시폐에 대해 상소하다
정언 김재천(金載天)이 상소하여 맨 먼저 언로를 여는 방도에 대해 말하고, 이어서 말로써 죄를 얻은 사람을 불러 쓸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언 김용(金容)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주상의 마음이 하나라도 한쪽에 치우치면 희로(喜怒)가 정도(正道)를 잃고 상벌이 형평을 잃는데, 모든 정사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뭇 신료들은 이로 말미암아 태만해집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정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지나치게 격노하시어 문득 견책하시므로 매양 처분이 지나치실 때마다 대소 신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죽음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이하생략

【註】김용(金容,1726년-1772년) : 연안김씨 18세(世), 직강공파 나산종중의 자헌대부지중추부사 김상신(金相紳)의 아들, 1761년 신사정시문과(辛巳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증조 김수오(金粹五), 할아버지 김호(金灝), 아버지 김상신에 이어 연4대가 문과에 급제한 기록을 남김, 흥미로운 것은 사간원 정원 두분이 모두 연안김씨라는 사실입니다 


영조 47년(1771 신묘) 7월 14일 남태저·한필수·권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남태저(南泰著)를 대사헌으로, 한필수(韓必壽)를 대사간으로, 권영(權穎)을 집의로, 이치중(李致中)을 사간으로, 김상집(金尙集)·김재천(金載天)을 장령으로, 서유원(徐有元)을 헌납으로, 이한일(李漢一)·권회(權恢)를 지평으로, 임희증(任希曾)·이범제(李範濟)를 정언으로, 조종현(趙宗鉉)을 교리로, 이양수(李養遂)를 부교리로, 홍상간(洪相簡)을 수찬으로, 김기대(金基大)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셋째, 재문(載文)공은 재구공의 계형(季兄,막내형)으로 오촌숙 숙(火肅)공에게 출계(出系)하셨으며, 벼슬에 나가신 적이 없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을유보의 서문에 "오계형통덕락공학우이불사(吾季兄通德郞公學優而不仕)" 즉 "학문은 높았으나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으신 우리 계형 통덕랑공"은 휘자가 없어 확실하지는 않으나 재문공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리스트

增補文獻備考氏族編 延安金氏와 有關條에 杜撰이 있다
이진의 출처 김씨가 승석공의 따님(공부전서공파 상안공의 고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