族譜硏究資料




고려시대 호부(戶部)의 직제 변천
작성자 : 延松齋 작성일 : 2017-09-15 15:43:07       조회수 : 1213 파일 :

고려시대 호부(戶部)의 직제 변천과 호부원외랑

博士公25世孫 壽泳(直講公派羅山宗中)
 

고려시대 호부(戶部)의 직제 변천을 살펴보면

국초에는 민관(民官)이라 하였다가
성종 14년(995년)에 상서호부(尙書戶部)로 개편하였으며
문종(1046-1083)대에 호부의 직제를 보면 판사 1명(제신겸관),상서 1명(정2품), 지부사 1명(타관겸직), 시랑 2명(정4품), 낭중 2명(정5품), 원외랑 2명(정6품)을 두었다
충렬왕 원년(1275)에 상서호부를 판도사(版圖司)로 개편하여 판서, 총랑, 정랑, 좌랑 등의 관직을 두 었다
충렬왕 24년에 민조(民曹)로 다시 개편하였고 후에 민부(民部), 판도사(版圖司)로 다시 개칭하였다
공민왕 5년에 호부(戶部)로 개편하였고 후에 민부, 판도사, 민부로 개칭하였다
공양왕 원년에 호조(戶曹)로 개칭하 였다

우리 선조중에 고려시대 호부의 관직에 재직하셨던 분은
2세 호부원외랑 준구공과
3세 판도판서 경성공이시다.

세간에 호부원외랑 준구공의 벼슬이 시대에 맞지않는다면서 웃지못할 주장을 하는 이가 있다.

★.아버지 보다 먼저 낳은 아들이 있나? 高麗成宗 以前의 戶部 所屬 鄕吏職인 員外郞
戶部員外郞 俊龜 결국 벼슬이 아버지의 윗대 조상으로 존재하지 않했다
- 延安金氏正史 -
金暹漢- 俊龍- 0 0 -裕簡 - 大義 - 伯智 - 信劒 - 安柱
安寶-福壽-碩長-世良-成斗-善義,孝義


살펴보면 2세 호부원외랑 준구공은 신종(1197-1204)조에서 고종(1213-1259)조에 관직에 계셨을 것이라 추측된다
호부는 성종(981-997)때부터 원종(1259-1274)때까지 존재했던 관직으로 2세 준구공이 사시던 시대와 일치한다.
또한 호부원외랑은 조선시대 호조좌랑과 같은 관직으로 향리직이 아니다.
그리고 설령 조상의 관직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친할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할아버지를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얼마나 불효막심하고 한심스러운 일인가.

3세 판도판서 경성공은 고종(1213-1259)조 부터 충렬왕(1274-1308)조에 관직에 재직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판도판서를 지내섰고(충열왕때로 추정됨) 나이가 많아서 치사하셨다는 보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일설(경주김씨보서류)에 의하면 시조 박사공이 판도사정랑을 역임하였다고 하는 바

★.延安金氏貫祖
新羅第45代 神武王
英光-震禹(雨)-恒吉-進淀-仁康-順韋(左護衛門下侍郞)-正忠- 彦志-00-暹漢 分籍延安 四門博士 版圖司正郞
*전문연구부서의 자문을 구하여 불확실한 남의 조상은 과감하게 배제후 계보정립.
(四門博士는 文臣 版圖司正郞歷任 - 新羅金氏同源分貫分姓 系代譜에)
995년(成宗 14) 상서호부(尙書戶部), 호부, 판도사(版圖司) 등으로 고쳤다,~版圖司正郞(正5品)
- 海州鄭氏始祖 鄭肅은 神宗때 典法正郞을 지냈다
★ 國立圖書館 제11호, 제122호, 제357호, 제375 호, 제376호, 제450호, 제17호, 제457호보, 김씨대종사, 민족보결, 신라김씨세적유적, 한국씨족계보해설,전고대방 참고)으로 분명히 국립중앙도서관 자료 에서 발췌하여 만든 사료에서 나왔다)
* 版圖司正郞은 경주김씨계보연구회 에서도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펴보건대 판도사는 충렬왕 원년(1275년)에 상서호부를 개편한 것으로, 박사공이 사시던 명종조(1170-1197)와는 100년의 시차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은 허구의 근거없는 낭설임에도 이를 믿는 이가 있다면 한심한 노릇이다.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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