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顔樂堂集』과 延安金氏의 淵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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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수영 | 작성일 : 2017-09-15 15:25:14 조회수 : 1299 | 파일 : |
『顔樂堂集』과 延安金氏의 淵源
延安金氏大宗會顯彰硏究委員會
硏究委員 博士公25世孫 壽泳(直講公派羅山宗中)
| < 목 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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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序論) Ⅱ. 『안락당집(顔樂堂集)』 1. 『안락당집』의 판본(板本) 2. 『안락당집』의「세계(世系)」 Ⅲ. 조선중기이전의 고증자료 및 우리의 초기 족보 1.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2. 「인목왕후릉지문(仁穆王后陵誌文)」 3. 『씨족원류(氏族源流)』 4. 기해보(己亥譜) 5. 을유보(乙酉譜) Ⅳ. 연안김씨의 연원(淵源) 1. 연안김씨 연원 고찰 2. 기해보 범례의 오류 3. 연안김씨의 연원 Ⅴ. 제언(提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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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序論)
씨족의 연원(淵源)은 그 씨족의 시조사(始祖史) 즉 시조선계(始祖先系)와 시조의 행력(行歷)을 고찰함으로써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연안김씨의 시조선계(始祖先系)와 시조 박사공(博士公)의 행력이 기록된 제일 오래된 문헌은 『안락당집』이다. 『안락당집』은 안락당(顔樂堂) 흔(?)공의 사후 20여년 후에 그의 시문(詩文)을 아들 안로(安老)공이 수습 편집한 문집이다. 문집으로서의 가치도 크지만 본 문집 권3의「세계(世系)」는 연안김씨의 연원을 밝힌 최고(最古)의 기록으로서 우리에게 더욱 값진 것이다. 『안락당집』의 판본, 편차, 전본(傳本) 등을 파악하고, 「세계(世系)」의 기록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연안김씨의 연원을 고찰하는 첫 걸음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아가 연안김씨와 관련된 조선중기이전의 고증자료 및 우리의 초기 족보인 기해보와 을유보를 함께 비교함으로써 우리 연안김씨의 연원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안락당집(顔樂堂集)』
1.『안락당집』의 판본(板本)
『안락당집』의 초간본(初刊本)은 1514년(중종9년)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간행되었고, 2년 후 번각본(飜刻本)이 영천군(榮川郡)에서 간행되었으며, 1905년 후손들이 활자본으로 중간(重刊)하였다. 그리고 필사 고본(稿本) 1질이 전해오고 있어 지금까지 『안락당집』은 모두 4종이 있다.
1) 초간(初刊)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
『안락당집』 초주갑인자본 전본(傳本)이 있다는 사실을 2007년 5월에 이미 밝힌바 있으나, 『안락당집』이 초주갑인자로 간행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서지학계의 권위자인 김두종(金斗鐘)박사의 『한국고인쇄기술사』 갑인자인본 서목을 보면 중종조에 간행된『안락당집』 4권이「화산서림구장본」으로 수록되어 있다. 화산서림(華山書林)이란 고 이성의(李聖儀)씨가 운영해온 고서점으로, 이성의씨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을 소중하게 여겨 초간(初刊) 또는 선본(善本)과 오래된 희귀본(稀貴本)이라면 별도로 소중하게 보관했다. 이성의씨가 1965년 6월에 타계한 뒤 가족들이 장서를 미국에 있는 한국학관계 대학으로 처분할 것을 논의하고 민원서를 문교부에 제출했다. 심사결과 인조 14년(1636)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 이전의 전적(典籍)은 희관본(稀觀本) 또는 귀중본(貴重本)에 해당되므로 국외반출이 불가능하고 그 이후의 간인본(刊印本)과 필사본(筆寫本)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 일부가 미국 Columbia대학으로 반출되었다. 그 후 1972년에 그 나머지가 고려대학교도서관으로 기증되었는데 이 때 『안락당집』 초간본인 갑인자본도 고려대학교도서관으로 기증되었다. 현재 고려대학교도서관에 곤책 권삼지사(卷三之四)만 소장되어 있고 건책이 낙질(落帙)되었다. 고려대학교로 기증되기 전에 화산서림에서 유출된 것으로 짐작된다. 아래는 고려대학교도서관의 『안락당집』 서지자료이다
서 명 : 『안락당집(顔樂堂集)』 장 르 : 고서 형 태 : 零本1冊, 四周單邊, 半廓 25.2×17.2cm, 有界, 10行17字 小字雙行, 內向花紋魚尾 크 기 : 31.2×20.6 cm 저 자 : 金訢(朝鮮), 金安老(朝鮮) 編 판 사 항 : 甲寅字 간 사 지 : 刊寫地未詳 간 사 자 : 刊寫者未詳 간 사 년 : 中宗9년(1514) 분 류 : 화산 貴140 2 소장위치 : 고려대학교 도서관 |
조선시대 관판본(官版本)은 중앙의 교서관(校書館)이나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출한 국가의 전장(典章), 사서(史書), 경전(經典) 등인데 대개는 중앙에서 활자로 인쇄하여 관서 및 관원에게 반사(頒賜)하게 된다. 그러나 널리 반사할 필요가 있거나 또는 후대까지 널리 전해야 될 중용한 서책은 그 활자본을 지방의 각 감영으로 보내 관명(官名)으로 다시 각판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가(私家)의 저술이라도 국가 발전과 문화 향상에 중요한 것이면 관명으로 중앙과 지방에서 각판하기도 하였다. 개인의 문집을 발간한 것은 성종(成宗)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 1454∼1488)의 『풍월정집(風月亭集)』을 성종의 지시로 1489년에 인쇄한 기록이 있다. 『안락당집』을 초주갑인자로 간행하고 더구나 영천군에서 번각하여 출판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안락당 흔(?)공의 문장이 얼마나 품격이 높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안락당집』 초주갑인자본은 현재 고려대학교도서관에 소장된 곤책뿐이며 건책이 낙질되었다는 점이다. 낙질된 『안락당집』 권일지이(卷一之二)는 어디에 있는가? 화산서림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서점인 통문관에 『안락당집』 건책이 소장되어 있다. 김일근(金一根)교수는 『안락당집』을 연구하여 수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1966년 『국어국문학』 31호에 발표한 김일근교수의 「두시언해와 황산곡시집언해에 대한 재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顔樂堂集 初刊 乾冊의 提示
이제 筆者는 一言以蔽之하고 기발표의 推理가 正當하였다는 決定的인 物的 證據가 되는 初刊 乾冊을 提示하고, 李敎授가 絶對 없다고 斷定한 ‘飜譯杜詩序’가 正德初版에도 儼然히 存在함을 目擊에 資코자 한다. 이 貴重本은 通文館 李謙魯님의 所藏으로 지난봄에 發見을 하고 國立圖書館藏 坤冊과 同一版임을 確認하였다. 이제 비로소 同文集의 初刊 完帙을 본 셈이다. 물론 ‘飜譯杜詩序’는 第二卷 第4次에 儼存하고, 興味롭게도 重刊에 없는 南袞의 序文이 卷首에 붙어있다. 南序가 重刊에 削除되었음은 ‘杜詩諺解 重刊에 金?의 序文이 削除되었으리라’는 것과 同質的이며 새로운 傍證도 될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통문관에 『안락당집』 건책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일근교수는 통문관 소장본을 “국립도서관장(國立圖書館藏) 곤책과 동일판임을 확인하였다.” 하였으나 서지학적으로 번각여부를 판단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김일근교수의 연구논문에 대하여 반론을 펴온 이병주(李丙疇)교수의 「김흔의 번역두시서에 대한 재론」이란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 때 筆者는 通文館主 李謙魯氏 所藏인 古版本 ‘顔樂當集’ 乾冊을 提示하면서, 대략 다음과 같이 實證한 줄로 記憶하고 있다.
(1) 金?의 ‘飜譯杜詩序’(以下 略稱 ‘金序’)가 실린 ‘顔樂當集’은 筆者가 言及한 바대로(上揭 硏究發表時와 小論 發表時는 1905年 活版本만 金敎授에게서 傳讀했고, 그 뒤 국립도서관 所藏 正德版 坤冊만 參考했음) 家傳의 手草를 모은 補遺本이다. 그 證明으로 이 正德 古板本 ‘顔樂當集’은 南袞의 序와 姜渾의 序 다음 張이 ‘顔樂當集補遺’이고, 그 다음 張이 卷之一임을 明示하였다.
이 글을 보면 통문관 소장『안락당집』 건책의 편차가 ‘서문(序文)’다음에 ‘보유(補遺)’이고 그 다음이 ‘권지일(卷之一)’이라고 하였다. 아래에 명시한 번각 목판본에는 ‘보유’가 제1권의 권말에 있다. 초주갑인자본은‘보유’를 제1권 앞에 두었으나 번각본은 권말로 옮겨 간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통문관 소장본은 초주갑인자본일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의 편차는 하기 번각본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확인할 수 없어 소장 여부 나아가 초주갑인자본인지도 알 수 없다.
2) 번각(飜刻) 목판본(木版本)
1516년 영천군(榮川郡,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개간(開刊) 목판본은 초주갑인자 번각본(飜刻本)이다. 『안락당집』이 1514년에 초주갑인자로 간행되고, 2년 후인 1516년에 영천군수 권오기(權五紀)가 초주갑인자본을 번각하여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한국고인쇄기술사』에 의하면 『고사촬요(攷事撮要)』의 영천군 책판목록에 『안락당집』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번각본 건책은 서강대학교도서관과 충남대학교도서관에서 일부분씩을 소장하고 있고, 곤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서강대학교도서관 명시되어 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제15권으로 영인표점(影印標點) 간행하였다.『한국문집총간』 해제에서『안락당집』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顔樂堂集
판심제 : 顔樂, 간종 : 목판본, 간행년 : 1516年刊, 권책 : 4권 2책, 행자 : 10행 17자, 규격 : 24×17.5Cm, 어미 : 黑口上下 黑魚尾, 소장처 : 序 및 권1~권2의 第36板(서강대학교 중앙도서관), 권2의 第37板~권2 끝(충남대학교 중앙도서관), 권3~4 및 跋(국립중앙도서관)
본 문집은 4권 2책으로서 권1은 詩, 권2는 雜著, 권3~4는 附錄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編者가 문집의 편찬을 마친 1513년에 쓴 南袞과 姜渾의 序文이 있다.
권1에는 시가 실려 있으며 전반부에는 편자가 收拾한 詩를 詩體나 창작 시기의 구분 없이 수록하고, 후반부에는 저자의 自編行錄인 〈扶桑紀行錄〉과 〈觀光錄〉을 토대로 대략 창작순서에 따라 편차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 金宗直ㆍ金克儉이 쓴 〈跋扶桑紀行錄後〉가 첨부되어 있다. 卷外의 補遺에는 시 2수가 실려 있는데, 이는 板下本을 간행하기 직전에 수습하여 보유한 것으로 추측된다.
권2에는 29편의 散文을`雜著’로 標題하여 수록하였다. 文體別로는 辨 1편, 序 3편, 上梁文 1편, 諡冊文 1편, 祭文 1편, 歌謠(詞) 2편, 記 1편, 箋 5편, 疏 5편, 箚 3편, 策題 1편, 對策 1편, 辭 1편과 그 외에 3편의 글이 실려 있다. 散文은 전체적으로 公事에 관한 내용이 많아 10여 년간 文事를 담당했던 저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卷 뒤에 편자의 발과 저자의 弟 金詮의 跋 및 李沆의 題詩가 있으며, 跋文에서는 시문을 收拾編輯한 경위를 밝히고 있다.
권3에는 三子인 金安老가 撰한 世系와 年譜가 실려 있다. 世系는 世系圖와 함께 直系先祖에 대한 간략한 行歷을 기술하고 있다. 뒤에는 부친(金友臣)의 行狀과 1511년 申用漑가 지은 神道碑銘이 실려 있다.
권4에는 저자와 兄(金諶)의 墓道文字 및 編者가 撰한 〈遺行〉〈先執記〉가 있다. 〈遺行〉은 『國朝寶鑑』 등의 기록과 家族ㆍ知己들의 口傳을 모은 것으로 저자에 관한 逸話가 다양하게 들어 있고 각 사례의 末尾에 小註로써 採集 출처를 밝혔다. 〈先執記〉는 저자와 交遊한 諸人의 기록으로, 金宗直 등 29명의 人的事項, 登科행력, 官歷 등을 약술하고, 아울러 인물에 대한 간략한 평을 붙였다. 권 뒤에는 附錄을 撰輯한 경위와 소감을 적은 편자의 발문이 실려 있다.
권미에는 1514년에 쓴 金安國의 跋과 ‘奉正大夫行郡守 權五紀 皇明正德丙子孟秋 榮川郡開刊’이란 刊記가 있다.
3) 중간(重刊) 활자본(活字本)
이 활자본으로 중간(重刊)하였다. 초간본 건책의 내용을 2책 4권으로 나누어 1책(1권, 2권)은 시(詩) 2책(3권, 4권)은 문(文)으로 편집하였으며, 초간본 곤책의 내용은 편집에서 제외하였으므로 중간본에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세계」를 포함한 부록은 『안락당집』 중간본에는 없다. 근대에 간행되었으나 보기 어려운 희귀본(稀貴本)이다. 김일근교수가 1질을 소장하고 있고, 최근 시중 고서점에 곤책 한 권이 나왔으나 미처 입수하지 못했다. 김일근교수는 필사 고본의 영인본 해제에서 중간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다만 번각 목판본을 초간본으로 설명하고 있다.
重刊本
光武乙巳(1905)刊 乾坤2冊4卷 28Cm×19Cm, 四周雙邊, 半廓 21Cm×16.1Cm 13行 28字 注雙行, 內向上下 雙葉魚尾, 序 ; 光武乙巳 11代孫 龍秀(重刊序), 姜渾(初刊序), 跋 ; 金安國(初刊), 上同 龍秀.
初刊本과 編次上의 差異點이 많으니 注意할 일이며 다음에 初重刊을 比較對照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4) 필사(筆寫) 고본(稿本)
후손가(後孫家)에 전해오던 『안락당집』 필사본은 그 체제로 보아 간행을 위해 준비한 고본일 것으로 짐작된다. 초간본 건책(권1, 권2)의 내용을 1책 4권으로 다시 편집하였으며, 초간본 곤책(권3, 권4)은 희락당 안로(安老)공의 문집인 『희락당고(希樂堂稿)』 제8권말에 「후부(後附)」로 옮겨 편집하였다. 본래 『안락당집』곤책 권3과 권4는 안로(安老)공의 소찬인 관계로 『희락당고』로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근래에 김일근교수가 후손가에서 『안락당집』 고본과 『희락당고』 고본을 입수하여, 1974년 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상하 2책으로 합본영인(合本影印)하고 해제(解題)를 붙여 출판하였다. 영인본 해제에 『안락당집』 필사 고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筆寫本
筆寫年代 未詳 1冊4卷 28.6Cm×18.7Cm, 四周雙邊, 半廓 24Cm×16Cm 有界 10行 19字 小註雙行, 黃色厚褙 紅絲綴, 序跋無,
이 筆寫本은 重刊本의 臺本이었음이 確實한 것이 上述과 같은 板匡과 界線을 整然하게 그어서 字數도 一定하게 精書하였다.
그런 까닭에 文獻價値로 보아서는 重刊本에 앞서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 本影印本의 臺本으로 삼는 理由의 하나가 된다. 編次와 內容은 重刊本과 같되 重刊本에 添附된 補遺部分만 없는 셈이다. 現在 傳本은 勿論 筆者 所藏의 一卷밖에 없는 것이다
2.『안락당집』의 「세계(世系)」
『안락당집』은 희락당 안로(安老)공이 흔(?)공의 시문을 편집한 것이며, 특히 부록인 권3과 권4는 안로(安老)공 소찬임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안로(安老)공은 『안락당집』 권3의 「세계(世系)」에 시조 박사공의 선계(先系)와 행력(行歷)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金氏系出新羅宗姓。初兄弟二人在國, 直諫忤王, 流遠地遂除籍, 兄居北濱京, 弟居豉鹽城因家焉。國子博士諱暹漢是其後孫, 由博士公以上世遠無籍不可考。
≪연안김씨는 신라왕족에서 나왔다. 처음에 형제 두 사람이 있어 직간하다가 왕에게 미움을 받아 먼 곳으로 유배되고 마침내 제적되어 형은 북빈경(北濱京)에 살았고, 아우는 시염성(?鹽城)에 살면서 한 집안을 이루었다. 국자감 사문박사 휘 섬한(暹漢)은 그 후손이며 박사공(博士公) 이상은 세계가 멀고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다.≫
遠祖諱暹漢, 好學不倦於書無不讀。沈潛聖賢之訓, 深有所得, 名震關西。有一按察慕公風, 一見如舊, 秩滿載與還京。遂登司馬試陞上舍, 明年登乙科授國子四門博士, 大興儒敎。
≪원조휘섬한. 학문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현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심오한 이치를 터득한 바 그 이름이 관서에 떨쳤다. 그 당시 안찰사가 공의 높은 학문과 행적을 흠모하여, 처음으로 만났지만 옛날부터 사귄 벗같이 친밀하게 지내더니, 관직이 만기가 되어 공을 대동하고 개경으로 돌아 왔다. 곧 사마시에 합격하여 상사(上舍)에 들어가고, 다음해에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四門博士)에 제수되니 유학이 크게 흥왕하였다.≫
희락당 안로(安老)공은 『안락당집』 4권 말미의 지(誌)에「세계(世系)」 기록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嗚呼, 顯揚先德, 孤安老能之哉。吾宗自鼻祖至先府君, 世積代邈, 系籍又沒, 逮我眇末, 曾高以上尙亦昧昧, 孤未嘗不痛慨於斯。編輯先稿, 旣孤以見聞, 旁證古譜, 序爲世系, 尾付于編。
≪오호라 선조의 덕행을 현양(顯揚)함에 내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종문(宗門)이 시조로부터 선부군(先府君)에 이르기 까지 세월이 쌓여서 세대가 아득하고 또 계적(系籍)이 없어진 채 나의 대에 와서도 증조와 고조 이상은 자세하지 못하여 일찍이 통탄함을 금치 못하였다. 선고(先考)의 유집을 편집하고 이어서 내 보고 들은 것으로 고보(古譜)를 두루 논증(論證)하여 차례대로 세계를 기록하고 유집 말미에 붙인다.≫
마지막 부분을 『연안김씨세사』 제1집 「연안김씨의 발상」에서는 아래와 같이 역해하였다.<『연안김씨세사』제1집 64쪽 참조>
≪編輯先稿旣。孤以見聞, 旁證古譜序, 爲世系, 尾付于編。≫
선고(先考)의 유집편찬이 이미 끝났다. 내 보고 들은 바와 고보서(古譜序)를 방증(傍證)으로 삼아 세계를 기록하여 이 유집의 말미(末尾)에 붙이노라.
그러나 이 역해에 의문이 있다. ‘방증(傍證)’은 간접적인 것을 증거로 삼는 것이니, 『안락당집』의 「세계(世系)」 기록은 간접적인 것을 증거로 삼아 기록한 것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고보서(古譜序)를 방증으로 삼는다.’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다음과 같이 역해하는 것이 안로(安老)공의 본의(本意)일 것이다.
≪編輯先稿, 旣孤以見聞, 旁證古譜, 序爲世系, 尾付于編。≫
선고(先考)의 유집을 편집하고, 이어서 내가 보고 들은 것으로 고보(古譜)를 두루 논증(論證)하여 차례대로 세계를 기록하고 유집 말미에 붙인다.
안로(安老)공이 ‘고보(古譜)를 두루 논증하였다’ 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도 꽤 오래된 족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안락당집』의 「세계(世系)」는 안로(安老)공의 높은 학식으로 논증하여 기록한 것이니 이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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