譜學硏究論壇




『顔樂堂集』과 延安金氏의 淵源
작성자 : 김수영 작성일 : 2017-09-15 15:25:14       조회수 : 1299 파일 :

『顔樂堂集』과 延安金氏의 淵源


延安金氏大宗會顯彰硏究委員會
硏究委員 博士公25世孫 壽泳(直講公派羅山宗中)

 


< 목 차 >
Ⅰ. 서론(序論)
Ⅱ. 『안락당집(顔樂堂集)』
    1. 『안락당집』의 판본(板本)
    2. 『안락당집』의「세계(世系)」
Ⅲ. 조선중기이전의 고증자료 및 우리의 초기 족보
    1.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2. 「인목왕후릉지문(仁穆王后陵誌文)」
    3. 『씨족원류(氏族源流)』
    4. 기해보(己亥譜)
    5. 을유보(乙酉譜)
Ⅳ. 연안김씨의 연원(淵源)
    1. 연안김씨 연원 고찰
    2. 기해보 범례의 오류
    3. 연안김씨의 연원
Ⅴ. 제언(提言)


 


Ⅰ. 서론(序論)

씨족의 연원(淵源)은 그 씨족의 시조사(始祖史) 즉 시조선계(始祖先系)와 시조의 행력(行歷)을 고찰함으로써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연안김씨의 시조선계(始祖先系)와 시조 박사공(博士公)의 행력이 기록된 제일 오래된 문헌은 『안락당집』이다. 『안락당집』은 안락당(顔樂堂) 흔(?)공의 사후 20여년 후에 그의 시문(詩文)을 아들 안로(安老)공이 수습 편집한 문집이다. 문집으로서의 가치도 크지만 본 문집 권3의「세계(世系)」는 연안김씨의 연원을 밝힌 최고(最古)의 기록으로서 우리에게 더욱 값진 것이다. 『안락당집』의 판본, 편차, 전본(傳本) 등을 파악하고, 「세계(世系)」의 기록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연안김씨의 연원을 고찰하는 첫 걸음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아가 연안김씨와 관련된 조선중기이전의 고증자료 및 우리의 초기 족보인 기해보와 을유보를 함께 비교함으로써 우리 연안김씨의 연원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안락당집(顔樂堂集)』

1.『안락당집』의 판본(板本)

『안락당집』의 초간본(初刊本)은 1514년(중종9년)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간행되었고, 2년 후 번각본(飜刻本)이 영천군(榮川郡)에서 간행되었으며, 1905년 후손들이 활자본으로 중간(重刊)하였다. 그리고 필사 고본(稿本) 1질이 전해오고 있어 지금까지 『안락당집』은 모두 4종이 있다.

1) 초간(初刊)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

 

『안락당집』 초주갑인자본 전본(傳本)이 있다는 사실을 2007년 5월에 이미 밝힌바 있으나, 『안락당집』이 초주갑인자로 간행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서지학계의 권위자인 김두종(金斗鐘)박사의 『한국고인쇄기술사』 갑인자인본 서목을 보면 중종조에 간행된『안락당집』 4권이「화산서림구장본」으로 수록되어 있다. 화산서림(華山書林)이란 고 이성의(李聖儀)씨가 운영해온 고서점으로, 이성의씨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을 소중하게 여겨 초간(初刊) 또는 선본(善本)과 오래된 희귀본(稀貴本)이라면 별도로 소중하게 보관했다. 이성의씨가 1965년 6월에 타계한 뒤 가족들이 장서를 미국에 있는 한국학관계 대학으로 처분할 것을 논의하고 민원서를 문교부에 제출했다. 심사결과 인조 14년(1636)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 이전의 전적(典籍)은 희관본(稀觀本) 또는 귀중본(貴重本)에 해당되므로 국외반출이 불가능하고 그 이후의 간인본(刊印本)과 필사본(筆寫本)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 일부가 미국 Columbia대학으로 반출되었다. 그 후 1972년에 그 나머지가 고려대학교도서관으로 기증되었는데 이 때 『안락당집』 초간본인 갑인자본도 고려대학교도서관으로 기증되었다. 현재 고려대학교도서관에 곤책 권삼지사(卷三之四)만 소장되어 있고 건책이 낙질(落帙)되었다. 고려대학교로 기증되기 전에 화산서림에서 유출된 것으로 짐작된다. 아래는 고려대학교도서관의 『안락당집』 서지자료이다

 

서 명 : 『안락당집(顔樂堂集)』
장 르 : 고서
형 태 : 零本1冊, 四周單邊, 半廓 25.2×17.2cm,
有界, 10行17字 小字雙行, 內向花紋魚尾
크 기 : 31.2×20.6 cm
저 자 : 金訢(朝鮮), 金安老(朝鮮) 編
판 사 항 : 甲寅字
간 사 지 : 刊寫地未詳
간 사 자 : 刊寫者未詳
간 사 년 : 中宗9년(1514)
분 류 : 화산 貴140 2
소장위치 : 고려대학교 도서관


 

조선시대 관판본(官版本)은 중앙의 교서관(校書館)이나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출한 국가의 전장(典章), 사서(史書), 경전(經典) 등인데 대개는 중앙에서 활자로 인쇄하여 관서 및 관원에게 반사(頒賜)하게 된다. 그러나 널리 반사할 필요가 있거나 또는 후대까지 널리 전해야 될 중용한 서책은 그 활자본을 지방의 각 감영으로 보내 관명(官名)으로 다시 각판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가(私家)의 저술이라도 국가 발전과 문화 향상에 중요한 것이면 관명으로 중앙과 지방에서 각판하기도 하였다. 개인의 문집을 발간한 것은 성종(成宗)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 1454∼1488)의 『풍월정집(風月亭集)』을 성종의 지시로 1489년에 인쇄한 기록이 있다. 『안락당집』을 초주갑인자로 간행하고 더구나 영천군에서 번각하여 출판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안락당 흔(?)공의 문장이 얼마나 품격이 높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안락당집』 초주갑인자본은 현재 고려대학교도서관에 소장된 곤책뿐이며 건책이 낙질되었다는 점이다. 낙질된 『안락당집』 권일지이(卷一之二)는 어디에 있는가? 화산서림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서점인 통문관에 『안락당집』 건책이 소장되어 있다. 김일근(金一根)교수는 『안락당집』을 연구하여 수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1966년 『국어국문학』 31호에 발표한 김일근교수의 「두시언해와 황산곡시집언해에 대한 재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顔樂堂集 初刊 乾冊의 提示
이제 筆者는 一言以蔽之하고 기발표의 推理가 正當하였다는 決定的인 物的 證據가 되는 初刊 乾冊을 提示하고, 李敎授가 絶對 없다고 斷定한 ‘飜譯杜詩序’가 正德初版에도 儼然히 存在함을 目擊에 資코자 한다. 이 貴重本은 通文館 李謙魯님의 所藏으로 지난봄에 發見을 하고 國立圖書館藏 坤冊과 同一版임을 確認하였다. 이제 비로소 同文集의 初刊 完帙을 본 셈이다. 물론 ‘飜譯杜詩序’는 第二卷 第4次에 儼存하고, 興味롭게도 重刊에 없는 南袞의 序文이 卷首에 붙어있다. 南序가 重刊에 削除되었음은 ‘杜詩諺解 重刊에 金?의 序文이 削除되었으리라’는 것과 同質的이며 새로운 傍證도 될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통문관에 『안락당집』 건책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일근교수는 통문관 소장본을 “국립도서관장(國立圖書館藏) 곤책과 동일판임을 확인하였다.” 하였으나 서지학적으로 번각여부를 판단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김일근교수의 연구논문에 대하여 반론을 펴온 이병주(李丙疇)교수의 「김흔의 번역두시서에 대한 재론」이란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 때 筆者는 通文館主 李謙魯氏 所藏인 古版本 ‘顔樂當集’ 乾冊을 提示하면서, 대략 다음과 같이 實證한 줄로 記憶하고 있다.
(1) 金?의 ‘飜譯杜詩序’(以下 略稱 ‘金序’)가 실린 ‘顔樂當集’은 筆者가 言及한 바대로(上揭 硏究發表時와 小論 發表時는 1905年 活版本만 金敎授에게서 傳讀했고, 그 뒤 국립도서관 所藏 正德版 坤冊만 參考했음) 家傳의 手草를 모은 補遺本이다. 그 證明으로 이 正德 古板本 ‘顔樂當集’은 南袞의 序와 姜渾의 序 다음 張이 ‘顔樂當集補遺’이고, 그 다음 張이 卷之一임을 明示하였다.

이 글을 보면 통문관 소장『안락당집』 건책의 편차가 ‘서문(序文)’다음에 ‘보유(補遺)’이고 그 다음이 ‘권지일(卷之一)’이라고 하였다. 아래에 명시한 번각 목판본에는 ‘보유’가 제1권의 권말에 있다. 초주갑인자본은‘보유’를 제1권 앞에 두었으나 번각본은 권말로 옮겨 간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통문관 소장본은 초주갑인자본일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의 편차는 하기 번각본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확인할 수 없어 소장 여부 나아가 초주갑인자본인지도 알 수 없다.

2) 번각(飜刻) 목판본(木版本)

 

 

1516년 영천군(榮川郡,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개간(開刊) 목판본은 초주갑인자 번각본(飜刻本)이다. 『안락당집』이 1514년에 초주갑인자로 간행되고, 2년 후인 1516년에 영천군수 권오기(權五紀)가 초주갑인자본을 번각하여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한국고인쇄기술사』에 의하면 『고사촬요(攷事撮要)』의 영천군 책판목록에 『안락당집』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번각본 건책은 서강대학교도서관과 충남대학교도서관에서 일부분씩을 소장하고 있고, 곤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서강대학교도서관 명시되어 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제15권으로 영인표점(影印標點) 간행하였다.『한국문집총간』 해제에서『안락당집』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顔樂堂集
판심제 : 顔樂, 간종 : 목판본, 간행년 : 1516年刊, 권책 : 4권 2책, 행자 : 10행 17자, 규격 : 24×17.5Cm, 어미 : 黑口上下 黑魚尾, 소장처 : 序 및 권1~권2의 第36板(서강대학교 중앙도서관), 권2의 第37板~권2 끝(충남대학교 중앙도서관), 권3~4 및 跋(국립중앙도서관)
본 문집은 4권 2책으로서 권1은 詩, 권2는 雜著, 권3~4는 附錄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編者가 문집의 편찬을 마친 1513년에 쓴 南袞과 姜渾의 序文이 있다.
권1에는 시가 실려 있으며 전반부에는 편자가 收拾한 詩를 詩體나 창작 시기의 구분 없이 수록하고, 후반부에는 저자의 自編行錄인 〈扶桑紀行錄〉과 〈觀光錄〉을 토대로 대략 창작순서에 따라 편차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 金宗直ㆍ金克儉이 쓴 〈跋扶桑紀行錄後〉가 첨부되어 있다. 卷外의 補遺에는 시 2수가 실려 있는데, 이는 板下本을 간행하기 직전에 수습하여 보유한 것으로 추측된다.
권2에는 29편의 散文을`雜著’로 標題하여 수록하였다. 文體別로는 辨 1편, 序 3편, 上梁文 1편, 諡冊文 1편, 祭文 1편, 歌謠(詞) 2편, 記 1편, 箋 5편, 疏 5편, 箚 3편, 策題 1편, 對策 1편, 辭 1편과 그 외에 3편의 글이 실려 있다. 散文은 전체적으로 公事에 관한 내용이 많아 10여 년간 文事를 담당했던 저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卷 뒤에 편자의 발과 저자의 弟 金詮의 跋 및 李沆의 題詩가 있으며, 跋文에서는 시문을 收拾編輯한 경위를 밝히고 있다.
권3에는 三子인 金安老가 撰한 世系와 年譜가 실려 있다. 世系는 世系圖와 함께 直系先祖에 대한 간략한 行歷을 기술하고 있다. 뒤에는 부친(金友臣)의 行狀과 1511년 申用漑가 지은 神道碑銘이 실려 있다.
권4에는 저자와 兄(金諶)의 墓道文字 및 編者가 撰한 〈遺行〉〈先執記〉가 있다. 〈遺行〉은 『國朝寶鑑』 등의 기록과 家族ㆍ知己들의 口傳을 모은 것으로 저자에 관한 逸話가 다양하게 들어 있고 각 사례의 末尾에 小註로써 採集 출처를 밝혔다. 〈先執記〉는 저자와 交遊한 諸人의 기록으로, 金宗直 등 29명의 人的事項, 登科행력, 官歷 등을 약술하고, 아울러 인물에 대한 간략한 평을 붙였다. 권 뒤에는 附錄을 撰輯한 경위와 소감을 적은 편자의 발문이 실려 있다.
권미에는 1514년에 쓴 金安國의 跋과 ‘奉正大夫行郡守 權五紀 皇明正德丙子孟秋 榮川郡開刊’이란 刊記가 있다.

3) 중간(重刊) 활자본(活字本)

 

 

이 활자본으로 중간(重刊)하였다. 초간본 건책의 내용을 2책 4권으로 나누어 1책(1권, 2권)은 시(詩) 2책(3권, 4권)은 문(文)으로 편집하였으며, 초간본 곤책의 내용은 편집에서 제외하였으므로 중간본에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세계」를 포함한 부록은 『안락당집』 중간본에는 없다. 근대에 간행되었으나 보기 어려운 희귀본(稀貴本)이다. 김일근교수가 1질을 소장하고 있고, 최근 시중 고서점에 곤책 한 권이 나왔으나 미처 입수하지 못했다. 김일근교수는 필사 고본의 영인본 해제에서 중간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다만 번각 목판본을 초간본으로 설명하고 있다.

重刊本
光武乙巳(1905)刊 乾坤2冊4卷 28Cm×19Cm, 四周雙邊, 半廓 21Cm×16.1Cm 13行 28字 注雙行, 內向上下 雙葉魚尾, 序 ; 光武乙巳 11代孫 龍秀(重刊序), 姜渾(初刊序), 跋 ; 金安國(初刊), 上同 龍秀.
初刊本과 編次上의 差異點이 많으니 注意할 일이며 다음에 初重刊을 比較對照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4) 필사(筆寫) 고본(稿本)

 


 

후손가(後孫家)에 전해오던 『안락당집』 필사본은 그 체제로 보아 간행을 위해 준비한 고본일 것으로 짐작된다. 초간본 건책(권1, 권2)의 내용을 1책 4권으로 다시 편집하였으며, 초간본 곤책(권3, 권4)은 희락당 안로(安老)공의 문집인 『희락당고(希樂堂稿)』 제8권말에 「후부(後附)」로 옮겨 편집하였다. 본래 『안락당집』곤책 권3과 권4는 안로(安老)공의 소찬인 관계로 『희락당고』로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근래에 김일근교수가 후손가에서 『안락당집』 고본과 『희락당고』 고본을 입수하여, 1974년 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상하 2책으로 합본영인(合本影印)하고 해제(解題)를 붙여 출판하였다. 영인본 해제에 『안락당집』 필사 고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筆寫本
筆寫年代 未詳 1冊4卷 28.6Cm×18.7Cm, 四周雙邊, 半廓 24Cm×16Cm 有界 10行 19字 小註雙行, 黃色厚褙 紅絲綴, 序跋無,
이 筆寫本은 重刊本의 臺本이었음이 確實한 것이 上述과 같은 板匡과 界線을 整然하게 그어서 字數도 一定하게 精書하였다.
그런 까닭에 文獻價値로 보아서는 重刊本에 앞서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 本影印本의 臺本으로 삼는 理由의 하나가 된다. 編次와 內容은 重刊本과 같되 重刊本에 添附된 補遺部分만 없는 셈이다. 現在 傳本은 勿論 筆者 所藏의 一卷밖에 없는 것이다

2.『안락당집』의 「세계(世系)」

『안락당집』은 희락당 안로(安老)공이 흔(?)공의 시문을 편집한 것이며, 특히 부록인 권3과 권4는 안로(安老)공 소찬임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안로(安老)공은 『안락당집』 권3의 「세계(世系)」에 시조 박사공의 선계(先系)와 행력(行歷)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金氏系出新羅宗姓。初兄弟二人在國, 直諫忤王, 流遠地遂除籍, 兄居北濱京, 弟居豉鹽城因家焉。國子博士諱暹漢是其後孫, 由博士公以上世遠無籍不可考。
≪연안김씨는 신라왕족에서 나왔다. 처음에 형제 두 사람이 있어 직간하다가 왕에게 미움을 받아 먼 곳으로 유배되고 마침내 제적되어 형은 북빈경(北濱京)에 살았고, 아우는 시염성(?鹽城)에 살면서 한 집안을 이루었다. 국자감 사문박사 휘 섬한(暹漢)은 그 후손이며 박사공(博士公) 이상은 세계가 멀고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다.≫

遠祖諱暹漢, 好學不倦於書無不讀。沈潛聖賢之訓, 深有所得, 名震關西。有一按察慕公風, 一見如舊, 秩滿載與還京。遂登司馬試陞上舍, 明年登乙科授國子四門博士, 大興儒敎。
≪원조휘섬한. 학문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현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심오한 이치를 터득한 바 그 이름이 관서에 떨쳤다. 그 당시 안찰사가 공의 높은 학문과 행적을 흠모하여, 처음으로 만났지만 옛날부터 사귄 벗같이 친밀하게 지내더니, 관직이 만기가 되어 공을 대동하고 개경으로 돌아 왔다. 곧 사마시에 합격하여 상사(上舍)에 들어가고, 다음해에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四門博士)에 제수되니 유학이 크게 흥왕하였다.≫

희락당 안로(安老)공은 『안락당집』 4권 말미의 지(誌)에「세계(世系)」 기록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嗚呼, 顯揚先德, 孤安老能之哉。吾宗自鼻祖至先府君, 世積代邈, 系籍又沒, 逮我眇末, 曾高以上尙亦昧昧, 孤未嘗不痛慨於斯。編輯先稿, 旣孤以見聞, 旁證古譜, 序爲世系, 尾付于編。
≪오호라 선조의 덕행을 현양(顯揚)함에 내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종문(宗門)이 시조로부터 선부군(先府君)에 이르기 까지 세월이 쌓여서 세대가 아득하고 또 계적(系籍)이 없어진 채 나의 대에 와서도 증조와 고조 이상은 자세하지 못하여 일찍이 통탄함을 금치 못하였다. 선고(先考)의 유집을 편집하고 이어서 내 보고 들은 것으로 고보(古譜)를 두루 논증(論證)하여 차례대로 세계를 기록하고 유집 말미에 붙인다.≫

마지막 부분을 『연안김씨세사』 제1집 「연안김씨의 발상」에서는 아래와 같이 역해하였다.<『연안김씨세사』제1집 64쪽 참조>

≪編輯先稿旣。孤以見聞, 旁證古譜序, 爲世系, 尾付于編。≫
선고(先考)의 유집편찬이 이미 끝났다. 내 보고 들은 바와 고보서(古譜序)를 방증(傍證)으로 삼아 세계를 기록하여 이 유집의 말미(末尾)에 붙이노라.

그러나 이 역해에 의문이 있다. ‘방증(傍證)’은 간접적인 것을 증거로 삼는 것이니, 『안락당집』의 「세계(世系)」 기록은 간접적인 것을 증거로 삼아 기록한 것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고보서(古譜序)를 방증으로 삼는다.’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다음과 같이 역해하는 것이 안로(安老)공의 본의(本意)일 것이다.

≪編輯先稿, 旣孤以見聞, 旁證古譜, 序爲世系, 尾付于編。≫
선고(先考)의 유집을 편집하고, 이어서 내가 보고 들은 것으로 고보(古譜)를 두루 논증(論證)하여 차례대로 세계를 기록하고 유집 말미에 붙인다.

안로(安老)공이 ‘고보(古譜)를 두루 논증하였다’ 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도 꽤 오래된 족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안락당집』의 「세계(世系)」는 안로(安老)공의 높은 학식으로 논증하여 기록한 것이니 이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가!

 

 

Ⅲ. 조선중기이전의 고증자료 및 우리의 초기 족보


1.「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세종실록지리지」는 『세종실록』 부록으로 1454년(단종 2년)에 완성되었으며, 각 도의 연혁, 고적, 물산, 지세 따위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연안도호부의 성씨관련부분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延安都護府, 本高句麗冬三忽, 新羅改爲海皋郡, 高麗初, 稱鹽州。<중략> 忠烈王三十四年戊申, 又陞爲溫州牧。忠宣王二年庚戌, 汰諸牧, 降爲延安府, 本朝因之, <중략> 土姓七, 宋、李、洪、高、康、田、金, 亡姓一, 鄭, 村落姓二, 車、魯, 續姓三, 叚、黃、崔。今皆爲鄕吏。≫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본래 고구려의 동삼홀(冬三忽)인데, 신라에서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염주(鹽州)라 하였다. <중략> 충렬왕 34년 무신에 또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시켰는데, 충선왕 2년 경술에 모든 목(牧)을 없앰에 따라 연안부(延安府)로 강등하였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중략> 토성(土姓)이 7이니, 송(宋)·이(李)·홍(洪)·고(高)·강(康)·전(田)·김(金)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정(鄭)이요, 촌락성(村落姓)이 2이니, 차(車)·노(魯)요, 속성이 3이니, 단(段)·황(黃)·최(崔)이다. 지금 모두 향리가 되었다.

성(姓)과 본관(本貫) 체계는 고려시대에 확립되었다. 태조 왕건은 전국의 크고 작은 호족을 제각기 출신 군현의 토성(土姓)으로 지정했다. 그리하여 토성은 출신지와 성을 아울러 의미하게 되었으며, 본관은 그 출신지를 지칭했다. 다시 말하면 토성(土姓)이란 고려시대부터 그 지방의 읍치에 거주하던 호족세력으로 각 읍사(邑司)의 향리와 상경관인(上京官人)을 공급했던 토박이 성이다. 우리는 연안(延安)의 토성(土姓) 씨족임을 「세종실록지리지」 연안도호부 성씨조(姓氏條)에서 찾아볼 수 는 것이다. 비록 우리 시조사(始祖史)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연안김씨가 고려시대부터 연안의 토박이 성(姓)으로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2.「인목왕후릉지문(仁穆王后陵誌文)」

『조선왕조실록』 인조 10년(1632년) 10월 6일조에 기록된 「인목왕후릉지문」은 국가에서 작성한 공식문서로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다. 연안김씨 연원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仁穆王后山陵, 復土告成。上以臣維, 忝長詞掖, 命撰玄宮之誌。臣承命悸恐, 自惟職事, 不敢以不文辭。謹按, 王后姓金氏, 系出新羅王族。其後有坐直諫, 謫豉鹽城, 子孫因籍焉, 後改延安府。始祖暹漢, 高麗四門博士。歷四代至濤, 有文章節行, 登皇朝制科, 宣授東昌府安丘縣丞, 東還, 官至密直提學。又四傳而至忠貞公詮, 官領議政, 以淸白聞, 於后爲高祖。
≪인목왕후의 산릉(山陵)에 흙을 덮는 일이 완성되자, 상이 신 유(維)가 사액(詞掖)의 관장(官長)이라 하여 현궁(玄宮)의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하시기에, 신이 명을 받고 황공스러웠으나 스스로 직책의 일을 생각해 보건대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왕후의 성은 김씨(金氏)로서 선계는 신라(新羅) 왕족에서 나왔다. 그 뒤에 바른 말로 간하다 죄를 입고 시염성(豉鹽城)으로 귀양 간 이가 있어 자손들이 인하여 관향을 삼았는데 뒤에 연안부(延安府)로 고쳤다. 시조(始祖)는 섬한(暹漢)인데 고려의 사문박사(四門博士)이며, 4대를 지나 도(濤)에 이르러서는 문장과 절행이 있어 황조(皇朝)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안구현승(安丘縣丞)에 제수되었고, 동쪽으로 돌아와서는 벼슬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으며, 또 4대가 지나 충정공(忠貞公) 전(詮)에 이르러서는 영의정 벼슬을 하여 청백(淸白)으로써 소문났는데, 왕후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3.『씨족원류(氏族源流)』

『씨족원류』는 1665년경에 조종운(趙從耘, 1607∼1683)이 540여개 성(姓)에 관한 자료를 포집(捕執)하여 필사(筆寫)했던 책을 후손인 조용진(趙鏞珍)교수가 수장(收藏)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1991년에 보경문화사에서 영인(影印) 출판한 것이다. 『씨족원류』에 는 시조 박사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延安金氏。金暹漢。國子四門博士。新羅時有王子兄弟, 以直諫忤主意謫遠地, 兄居北濱京, 弟居豉鹽城因以爲鄕。後孫暹漢登第爲博士, 訓誨後學不倦云。
≪연안김씨. 김섬한(金暹漢). 국자감 사문박사이다. 신라시대에 왕자형제가 있었는데 직간(直諫)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먼 곳으로 유적(流謫)되어, 형은 북빈경(北濱京)에 살았고, 동생은 시염성(豉鹽城)에 살면서 관향을 삼았다. 후손 섬한(暹漢)이 과거에 급제하여 박사가 되어 후학들을 가르쳐 인도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4. 기해보(己亥譜)

기해보는 서기1719년에 간행된 우리 연안김씨 최초의 대동보이다. 기해보 범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 범례의 기록은 다른 자료와 상충되는 되므로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

延安金氏族譜凡例。 延安古鹽州, 一云豉鹽城。<중략> 忠烈王陞爲溫州, 忠宣王降爲延安府, 別稱五原。我朝仍之焉。麗明宗時, 始祖博士公, 以直諫謫延安, 仍籍焉。
≪연안김씨족보범례. 연안(延安)의 옛 이름은 염주(鹽州)이며 다른 이름은 시염성(豉鹽城)이다. <중략> 충렬왕 때 온주(溫州)로 승격되었다가 충선왕 때 연안부(延安府)로 강등되었다. 별칭은 오원(五原)이다. 조선에서 그대로 따랐다. 고려 명종 때 시조 박사공이 직간하다가 연안으로 유적(流謫)되어 이에 관향이 되었다.≫

박사공의 행력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始祖金暹漢。好學不倦於書無不讀。沈潛聖賢之訓, 深有所得, 名震關西。有一按察慕公風, 一見如舊, 秩滿載與還京。遂登司馬試陞上舍, 明年登乙科第拜國子監四門博士。招諸生館下, 勸學不輟, 儒道日興, 文風大振。
≪시조 김섬한. 학문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현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심오한 이치를 터득한 바 그 이름이 관서에 떨쳤다. 그 당시 안찰사가 공의 높은 학문과 행적을 흠모하여, 처음으로 만났지만 옛날부터 사귄 벗같이 친밀하게 지내더니, 관직이 만기가 되어 공을 대동하고 개경으로 돌아 왔다. 곧 사마시에 합격하여 상사(上舍)에 들어가고, 다음해에 을과에 급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四門博士)에 제수되었다. 여러 유생들을 국자감에 모아 끊임없이 학문을 장려하여 유학이 날로 흥왕하고 문풍이 크게 떨쳤다.≫

5. 을유보(乙酉譜)

을유보는 서기1765년에 간행된 두 번째 대동보로 첫머리에 『안락당집』의 「세계(世系)」를 인용하여 시조선계(始祖先系)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金氏系出新羅宗姓。初兄弟二人在國, 直諫忤王, 流遠地遂除籍, 兄居北濱京, 弟居豉鹽城因家焉。國子博士諱暹漢是其後孫, 由博士公以上世遠無籍不可考。出後孫顔樂堂訢遺集。
≪연안김씨는 신라왕족에서 나왔다. 처음에 형제 두 사람이 있어 직간하다가 왕에게 미움을 받아 먼 곳으로 유배되고 마침내 제적되어 형은 북빈경(北濱京)에 살았고, 아우는 시염성(豉鹽城)에 살면서 한 집안을 이루었다. 국자감 사문박사 휘 섬한(暹漢)은 그 후손이며 박사공(博士公) 이상은 세계가 멀고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다. 출처는 후손 안락당 흔(訢)공의 유집이다.≫

박사공의 행력은 기해보의 기록과 동일하다.


Ⅳ. 연안김씨의 연원(淵源)


1. 연안김씨 연원의 고찰

고려(高麗)는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적(豪族的) 전통을 지닌 중앙귀족(中央貴族)이 통치하는 사회였다. 지방호족의 중앙관직 진출은 군공(軍功) 또는 과거(科擧)를 통하여 이루어 졌다. 과거에 급제한 지방호족은 솔가상경(率家上京)하여 중앙관료로서 새로운 생활을 개척해 나갔으며, 그 후손들은 계속해서 관료가 되어 하나의 독립된 신분층을 형성하면서 귀족화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안의 한 토성으로 자립잡고 있던 연안김씨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중앙으로 진출하였는가? 그리고 시조 박사공 이전 먼 조상들의 행적은 알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을 찾아 정리하는 것이 우리의 연원을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안락당집』의 「세계(世系)」, 조선중기이전의의 고증자료, 그리고 우리의 초기 족보인 기해보와 을유보 등의 시조선계, 본관의 연원, 시조 박사공의 행력에 대한 기록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상기 자료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시조선계(본관의 연원)

시조 박사공 행력

비고

안락당집

新羅宗姓兄弟直諫

流豉鹽城因家焉

博士公是其後孫

遠祖諱暹漢

名震關西, 按察載與還京

登乙科授國子四門博士

 

인목왕후릉지문

新羅王族直諫

謫豉鹽城因籍焉

(始祖暹漢)

始祖暹漢

高麗四門博士

안락당집과 같음

씨족원류

新羅王子兄弟直諫

謫豉鹽城因以爲鄕

(後孫暹漢)

後孫暹漢

登第爲博士

안락당집과 같음

기해보

高麗明宗時博士公直諫

謫延安仍籍焉

始祖金暹漢

名震關西, 按察載與還京

登乙科拜國子監四門博士

연원 다름

행력 같음

을유보

新羅宗姓兄弟直諫

流豉鹽城因家焉

博士公是其後孫

始祖金暹漢

名震關西, 按察載與還京

登乙科拜國子監四門博士

안락당집과 같음

 

 


위 표를 보면 시조선계와 본관의 연원은 기해보를 제외하고는 『안락당집』의 기록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박사공의 행력은 모든 자료가 『안락당집』의 기록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해보 범례의 오류여부를 살펴 이 기록이 부당하다면 안락당집에 기초한 시조사 정립이 타당할 것이다.

2. 기해보 범례의 오류

위 자료중 기해보 범례의 “高麗明宗時, 始祖博士公, 以直諫謫延安.” 즉 “고려 명종 때 시조 박사공이 직간(直諫)하다가 연안(延安)으로 유적(流謫) 되었다.”는 기록은 다른 자료와 상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이미 졸고「을유보서(乙酉譜序) 분석(分析)을 통한 편수경위(編修經緯) 고찰(考察)」에서 기술한 바 있으나 여기에 재론하고자 한다. 기해보 범례의 “高麗明宗時, 始祖博士公, 以直諫謫延安.”은 잘못된 기록이다.
첫째, 국자감 정8품 하급관리가 왕에게 직간하였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
둘째, 아무런 근거가 없다. 연안부사 재구(載久)공은 「을유보서(乙酉譜序)」에서 “顔樂去古未遠, 其言必有徵, 而舊譜謂博士公, 以直諫謫延安, 仍籍焉, 不知何所據也.” 즉 “안락당공(顔樂堂公)께서 그다지 오래된 분이 아니므로 반드시 증거가 있어서 한 말일 터인데 구보(舊譜)에 ‘박사공(博士公)이 직간(直諫)하다가 연안(延安)으로 유적(流謫)되어서 관향(貫鄕)이 되었다’는 것은 그 근거가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셋째, 박사공의 행력(行歷)과 서로 상반된다. 『안락당집』과 을유보는 물론 기해보에도 “박사공은 이름이 관서(關西)에 떨쳤고, 안찰사와 함께 상경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라고 하였는바, 관서지방은 철령(鐵嶺) 서쪽지방으로 고려시대의 서북면(西北面, 지금의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지역)과 서해도(西海道, 지금의 황해도지역)를 말하는 것이며, 안찰사는 도(道)에 두던 지방관이다. 따라서 시조 박사공은 본래 서해도 연안에 살던 분이며, 학문으로 입신하여 중앙에 진출한 것이다. 이상 시조 박사공에 대한 행력기록으로 보더라도, 기해보 범례의 기록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넷째, 박사공의 후손이 아닌 연안김씨 또는 염주인 김씨가 있다는 사실이다. 고려 공민왕 때의 김장수(金長壽 ?∼1363년)는 염주인(鹽州人)으로, 정묘호란 때 공을 세운 김언수(金彦壽, 1574∼1627)는 연안김씨로 기록되어 있지만, 박사공의 후손으로 계대(繼代)할 수 없다. 아마도 연안의 토성(土姓)으로서 읍치에 거주하던 박사공의 선대에서 갈라진 분들의 후예일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박사공 이전부터 연안은 우리의 관향이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가 상고할 수 있는 것은 박사공부터이므로 박사공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3. 연안김씨의 연원

고려시대의 사회적 배경과 우리나라 성관(姓貫) 형성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안락당집』의 「세계(世系)」, 특히 시조 박사공의 행력(行歷)과 그 선계(先系) 기록은 매우 타당한 것이다. 『안락당집』의 시조사(始祖史)는 대종회의 공식 견해이다. 나아가 우리 모두가 알아야할 연안김씨 발상의 역사인 것이다. 『안락당집』에 기초하여 연안김씨의 연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연안김씨(延安金氏)는 신라왕족에서 나왔다. 처음에 형제 두 사람이 있어 직간하다가 왕에게 미움을 받아 먼 곳으로 유배되고 마침내 제적되어 형은 북빈경(北濱京)에 살았고, 아우는 시염성(豉鹽城, 지금의 연안)에 살면서 한 집안을 이루었다. 국자감 사문박사 휘 섬한(暹漢)은 그 후손이며 박사공(博士公) 이상은 세계가 멀고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다.
시조 휘 섬한(暹漢)은 학문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현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심오한 이치를 터득한 바 그 이름이 관서에 떨쳤다. 그 당시 안찰사가 공의 높은 학문과 행적을 흠모하여, 처음으로 만났지만 옛날부터 사귄 벗같이 친밀하게 지내더니, 관직이 만기가 되어 공을 대동하고 개경으로 돌아 왔다. 곧 사마시에 합격하여 상사에 들어가고, 다음해에 을과에 급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에 제수되니 유학이 크게 흥왕하였다.≫


Ⅳ. 제언(提言)


『안락당집』은 그 문학적 가치가 높음은 논외로 하더라도 사가(私家)의 문집(文集)이 초주갑인자 관판본(官版本)으로 간행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연안김씨의 연원을 밝힌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서도 더없이 값진 것이다. 1514년에 간행된 초주갑인자본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1516년 영천군에서 번각(飜刻)한 목판본을 초간본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를 바로 알리는데 이 자료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연안김씨 선계(先系)에 대하여 일부 타성보(他姓譜) 등에 오류(誤謬)와 억측(臆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논박(論駁)하고 불식(拂拭)시키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2012. 6 .9. 博士公 25代孫 壽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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