譜學硏究論壇




인목왕후어필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에 대(對)한 소고(小考)
작성자 : 김수영 작성일 : 2017-09-15 15:06:28       조회수 : 2149 파일 :

인목왕후어필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에 대(對)한 소고(小考)


延安金氏大宗會顯彰硏究委員會
 硏究委員 博士公25世孫 壽泳(直講公派羅山宗中)

 


목 차
Ⅰ. 인목왕후(仁穆王后)와 칠장사(七長寺)
Ⅱ. 인목왕후께서 칠장사에 하사(下賜)하신 유물(遺物)
1. 오불회괘불탱(五佛會掛佛幀)
2.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3. 인목왕후어필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
Ⅲ. 인목왕후께서 명나라 장면(蔣冕)의 시를 수사(手寫)하시다
1. 명(明)나라 수보내각대학사(首輔內閣大學士) 장면(蔣冕)
2. 황조장면(皇朝蔣冕)의 노우시(老牛詩)를 읊다
Ⅳ. 인목왕후어필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 모본(摹本)
1. 숙종(肅宗)의 어명으로 제작된 어필모본(御筆摹本)
2.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인목왕후어필에 대한 기록
Ⅴ. 제언(提言)


 


Ⅰ. 인목왕후(仁穆王后)와 칠장사(七長寺)

 

칠장사(七長寺)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에 있는 고찰(古刹)로 서기 648년경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裝律師)가 창건하였다. 서기 1623년 인조즉위년에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께서 아버지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과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위해 원당(願堂)으로 삼고 크게 중수하였으며, 오불회괘불탱(五佛會掛佛幀) 1점, 친필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10권, 친필 칠언시(七言詩) 1축을 하사하여 지금도 전한다.

 

광해군(光海君)의 폭거(暴擧)가 극에 달한 계축화옥(癸丑禍獄)은 우리 연안김씨(延安金氏)의 큰 시련기였다. 그 때 희생된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공과 영창대군의 위패(位牌)가 인목왕후 위패와 함께 칠장사 본당에 모셔져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목왕후께서 칠장사에 하사하신 3점의 유물이 지금은 어떻게 보존되어 있는지 그 역사적 자취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 연안김씨가(延安金氏家)의 일이리라.
인목왕후어필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가 고시를 수사(手寫)한 것이라면 어느 시대 누구의 시인가? 그리고 칠장사 소장본 외에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있는 어필모본은 언제 만들어진 것인가? 인목왕후어필칠언시와 관련된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인목왕후께서 칠장사에 하사(下賜)하신 유물(遺物)

 

인목왕후께서 칠장사에 하사하신 3점의 유물 가운데 오불회괘불탱(五佛會掛佛幀)과 어필칠언시(御筆七言詩)는 지금도 칠장사에서 소장하고 있으나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은 다른 곳으로 반출되어 칠장사에는 영인(影印)된 사진만 게시되어 있다.

 

1. 오불회괘불탱(五佛會掛佛幀)

 

이 탱화는 인조6년(1628년)에 인목왕후께서 칠장사에 하사하신 것이라고 하며, 길이 6.56m, 폭 4.04m이며 국내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것으로써 국보 제296호 이다.
괘불(掛佛)이란 야외에서 의식을 행할 때 거는 대형 불화이며, 오불회탱(五佛會幀)이란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불, 약사불, 아미타불 등의 오불(五佛)이 강조된 탱화(幀畵)이다.
평소에는 큰 상자 속에 두루마리로 보관하고 있으나 특별한 의식(儀式)을 행할 때는 본당 앞에 걸어놓고 예불(禮佛)을 드린다.

 

2.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은 인목왕후가 계축화옥으로 참화를 당한 아버지 연흥부원군을 비롯한 친정 식구들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고 정명공주와 상궁들의 장수와 복을 빌기 위하여 당나라 의정이 번역한 '금광명최승왕경'을 광해군14년(1622년)에 백지에 먹으로 필사한 사경(寫經)으로 복위 후 칠장사에 하사하신 것이다.

 

본래 10권 10책이 칠장사에 전해 왔으나 지금은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칠장사 주지스님이 1965년 4월 12일 동국대학교에 기증(寄贈)하였다고 하며, 제1권 제1책은 없어지고 나머지 9책만 보존되어 있다.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전시된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의 설명문을 통하여 그 대략을 살필 수 있습니다.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세로34.6cm×가로12,0cm, 9책(절첩본), 백지묵서, 1622년

  

원래 10권의 사경이었으나 현재 제1권이 결실된 채 제2권부터 10권까지 총 9권이 있다. 매권 동일한 발문을 가지고 있으며 발문의 말미에 “大明天啓二年 敬書”라 적혀져 있어 중국 명나라 연호인 천계2년 즉, 1622년에 쓴 사경임을 알 수 있다.
사경지는 백지에 연분홍 물을 들였고 표지는 두터운 장지(壯紙)에 청ㆍ황ㆍ적ㆍ백ㆍ흑색의 오색 비단 바탕을 앞뒷면에 달리 배치하였으며, 전면표지에는 아름다운 연꽃자수와 함께 산호초와 화보문 자수를 나타낸 것이 특이하다. 표지의 연꽃자수는 수실로 짜여 진 직사각형 외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경제(經題)는 모두 적색바탕위에 묵서(墨書)되어 있다.
사경의 체제는 매권 사경지 1장을 4면으로 접었는데 총 25장으로 구성되었고 1권의 총 길이는 1,200cm이다. 변상(變相)은 없고, 상하 28cm의 묵서단선(墨書單線)이며, 1면 5행(발원문은 1면 6행), 1행 15자이다.
이 사경은 광해군의 폭정 속에서 사성(寫成)되어 인조반정 이후 왕대비가 된 소위 인목대비의 염원이 서린 유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또한 대비에 의하여 사성된 현존 유일본 이라는 점과 표지 장식을 통해 당시 궁중의 자수양식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3. 인목왕후어필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


인목왕후어필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는 지금도 칠장사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인목왕후(仁穆王后)께서 큰 글자로 고시(古詩)를 수사(手寫)한 것으로 종이바탕에 4행으로(각행 7자) 썼으며 근대에 족자(簇子)로 장황(裝潢)되었다.
크기는 길이 110㎝, 폭 50㎝이다. 보존이 양호한 편이며 다만 줄 사이가 좀 더 밝다.
시구(詩句)는 다음과 같다.

 

老牛用力已多年 / 노우용력이다년
늙은 소는 힘을 다한 지 이미 여러 해
領破皮穿只愛眠 / 영파피천지애면
목이 찢기고 가죽은 뚫려 단지 잠만 자고 싶구나.
犁耙已休春雨足 / 이파이휴춘우족
쟁기질 써레질도 끝나고 봄비도 흡족한데
主人何苦又加鞭 / 주인하고우가편
주인은 무엇이 괴로워 또 채찍을 가하는가?

 

어필 아래에는 서예가 배길기(裵吉基)가 1966년에 쓴 다음과 같은 발문이 있다.

 

右爲仁穆王后手寫古詩, 舊與金光明最勝王經藏於七長寺眞墨寶也, 今兩相校看其爲手筆無疑也, 丙午初夏 裵吉基謹跋

 

“이것은 인목왕후께서 고시(古詩)를 베껴 쓰신 것이다. 옛 부터 "금광명최승왕경"과 함께 칠장사에 소장되어온 진묵 보물이다. 이제 두 가지를 서로 비교하여 살펴보니 인목왕후의 친필임에 의문이 없다.”
서예가 배길기 교수가 1966년에 인목왕후어필칠언시와 수사(手寫) 불경인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의 글씨를 서로 비교하여 인목왕후의 친필임을 확인한 내용이다.

 

그리고 어필 28자의 점획(點劃)안에는 제월당(濟月堂)스님의 발원문(發願文) 29자가 작은 글자로 쓰여 있다고 한다.
왕후의 글씨로 한자 대자(大字)는 명성왕후의 예필을 빼면 현재로서는 인목왕후어필 외에 사례가 발견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인목왕후어필칠언시는 1973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관리해 오다 2010. 1. 4 보물 제1627호로 지정됐다.


Ⅲ. 인목왕후께서 명나라 장면(蔣冕)의 시를 수사(手寫)하시다

 

1. 명(明)나라 수보내각대학사(首輔內閣大學士) 장면(蔣冕)

 

인목왕후어필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는 인목왕후께서 지은 시가 아니고, 요산당외기(堯山堂外記) 권구십육(卷九十六)에 수록된 명나라 장면(蔣冕)의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인목왕후께서 수사(手寫)하신 것이다
 장면(蔣冕, 1462~1532)은 중국 명(明)나라 때 광서지방(廣西地方) 사람으로 홍치(弘治) 정덕(正德) 양조(兩朝)와 가정(嘉靖) 초기의 문신(文臣)이다.
정덕제(正德帝)가 아들이 없이 죽자 흥헌왕(興獻王) 주유원(朱裕杬)의 아들 주후총(朱厚熜)이 1521년에 뒤를 이었으니 이분이 세종(世宗) 즉 가정제(嘉靖帝)이다. 세종은 생부에 대한 존호(尊號) 등의 대례(大禮)문제로 조신(朝臣)들과 다투었다.
이 때 수보내각대학사(首輔內閣大學士)로 있던 장면은 세종의 생부를 추존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19년(1524년) 7월 25일 기록에 중국에서 돌아온 사은사(謝恩使) 신상(申鏛)이 중국의 존호추존과 장면의 치사(致仕)에 관한 보고내용이 있다.

 

사은사(謝恩使) 신상(申鏛)이 조정에 돌아왔다 <중략> 황제가 또 본생의 신주(神主)를 봉선전(奉先殿)의 서협실(西夾室)에 받들어 들일 때에 또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각로 장면(蔣冕)이 또 따라서 치사(致仕)하였으며 <이하생략>

 

요산당외기(堯山堂外記)는 명(明)나라 사람 장일규(蔣一葵)가 엮은 시화집(詩話集)으로 상고(上古)시대부터 명대(明代)까지 인물들의 전기 중에서 주로 시(詩)와 관련된 내용들이 실려 있으며, 만력(萬曆, 1573~1619)연간에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필사본(筆寫本)이 소장되어 있다.

 

요산당외기(堯山堂外記) 권구십육(卷九十六)에 수보내각대학사(首輔內閣大學士) 장면(蔣冕)이 벼슬에서 물러날 때의 일화와 함께 그의 칠언절구가 수록되어 있다.

 

蔣閣老冕歷仕三朝,始告歸田里,世廟慕其賢,使使三聘之,不至,睿制詩一闋頒云“聞説江南一老牛,徵書聘下已三秋。主人有甚相虧汝,幾度加鞭不轉頭”冕稽首俯伏以對詩云 “老牛用力已多年,領破皮穿只愛眠。犁耙已休春雨足,主人何用苦加鞭”終不就。

 

“각로(閣老) 장면(蔣冕)은 삼조(三朝)에서 벼슬을 지냈다. 이제 치사(致仕)하고자 하니 세종(世宗)은 그의 현명함을 사모하여 세 번이나 조정에 나올 것을 청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어 내렸다.
聞說江南一老牛, 徵書聘下已三秋. 主人有甚相虧汝, 幾度加鞭不轉頭.
장면(蔣冕)은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려 다음과 같은 시로 답하고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老牛用力已多年, 領破皮穿只愛眠. 犁耙已休春雨足, 主人何用苦加鞭“

 

인목왕후(1584~1632)는 당대(當代) 즉, 만력(1573~1619)연간에 중국에서 간행된 요산당외기(堯山堂外記)에 실려 있는 장면의 시를 수사(手寫)하신 것이다.
다만 마지막 구절 ‘主人何用苦加鞭’을 ‘主人何苦又加鞭’으로 두 글자를 바꾸어 쓰셨다.

 

2. 황조장면(皇朝蔣冕)의 노우시(老牛詩)를 읊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46년(1770년) 1월 25일 기록에 장면의 칠언절구를 “노우시(老牛詩)”라 하면서 영조(英祖)가 이 시를 읊은 내용이 있다.

 

庚寅正月二十五日巳時, 上御集慶堂。晝講入侍時 <중략> 噫, 皇朝蔣冕老牛詩, 豈不云乎? 老牛用力已多年, 飮破皮穿只愛眠, 鋤禾以後春雨足, 主人何事又加鞭? 此詩亦感御筆。噫, 彼農牛, 爲人終身勤勞, 而人則莫知其勞, 及其屠宰, 毛骨不遺 <이하생략>

 

그러나 이 시의 출처인 요산당외기(堯山堂外記)에는 제목이 없이 실려 있다.
당시 승정원일기를 작성한 사관(史官)이 시의 내용에 비추어 ‘노우시(老牛詩)‘라고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홍기원의 『인목대비의 서궁일기(2004.12초판, 민속원)』, 신명호의 『조선공주실록(2009.5초판, 위즈덤하우스)』과 『조선왕비실록(2007.5초판, 위즈덤하우스)』등에서 이 시를 ’민우시(憫牛詩)‘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노우시(老牛詩)가 이 시의 본래 지어진 배경과 더 어울릴 것 같다.

 

Ⅳ. 인목왕후어필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 모본(摹本)

 

1. 숙종(肅宗)의 어명으로 제작된 어필모본(御筆摹本)


인목왕후어필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는 칠장사 소장본 외에 3점의 모본(摹本)이 있다. 검은 비단에 금니(金泥)로 어필을 모사(模寫)한 쌍구전금니본(雙鉤塡金泥本)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덕수2503)하고 있다.
또한 어필을 모사(模寫)하여 목판(木版)으로 종이에 찍은 후 그 위에 가묵(加墨)한 목판전묵본(木版塡墨本)을 국립중앙박물관(덕4491)과 명안공주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보물 제1220호)로 강릉시립박물관에서 각각 소장하고 있다. 아래 그림은 강릉시립박물관 소장본이다.

 

이 모본(摹本)은 모두 칠장사 소장본 어필과 자형은 같으나 칠언시 28자를 3행으로 배열하고 글자 사이를 조절하였으며 첫머리에 “仁穆王后御筆“이라고 쓰여 있고, 3행 말미에 아래와 같은 숙종(肅宗)의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

 

兩家篋笥寶藏堅只恨揮毫不識年 東朝眞蹟傳宜壽分付良工字字鐫 又 刊了吾心校檢留一毫差謬是 深憂載臨 御墨祥輝集五色玲瓏 繞玉樓 壬辰春正月上元日拜手謹書右自製

 

이 모본(摹本)들은 칠장사의 어필칠언시를 모사(模寫)한 것이 아니고, 숙종(肅宗)의 발문(跋文)으로 미루어보아 양가(兩家)에서 보장(寶藏)해 오던 동조진적(東朝眞蹟) 즉, 왕후어필을 숙종38년(1712년)에 모사(模寫)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양가(兩家)가 어느 집안인지? 그리고 양가보장어필과 칠장사의 어필칠언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실마리를 승정원일기에서 찾을 수 있다.

 

2.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인목왕후어필에 대한 기록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인목왕후어필을 보장해오던 양가(兩家)가 연흥부원군의 후손인 김상윤(金相尹)과 선조의 증손 전계군(全溪君) 이부(李溥)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목왕후어필에 대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숙종38년(1712년) 임진년 1월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목왕후어필은 명(明)나라 사람의 시를 수사(手寫)한 것으로 본래 연흥부원군자손가(延興府院君子孫家)에서 보장하고 있었고, 전계군(全溪君) 이부(李溥)가 이를 구득하여 보장(寶藏)하고 있었던 것을 그 아들 이경(李㯳)이 숙종(肅宗)에게 봉헌(奉獻)한다.

 

둘째, 왕후께서 언제 쓰신 것인지 알아오라는 숙종의 명으로 연흥부원군봉사손돈령판관김상훈(延興府院君奉祀孫敦寧判官金相勛)과 어필의 본래 보장가(寶藏家)인 금부도사김상윤(禁府都事金相尹)에게 물어보았으나 모두 어필의 내력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중에 “仁穆王后有手寫明人詩句而作爲障簇”, “仁穆王后手書明時絶句之障子”, “仁穆王后御筆得之於故延興府院君臣金悌男子孫家”등의 구절로 미루어보아 인목왕후어필이 연흥부원군자손가에서 족자(簇子)형태로 보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경(李㯳)이 봉헌한 인목왕후어필이 연흥부원군자손가(延興府院君子孫家)에서 나온 것이라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으로 볼 때, 칠장사의 인목왕후어필칠언시와 자형(字形)이 같은 또 다른 어필이 연흥부원군자손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과 강릉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모본(摹本)들은 숙종38년에 이경(李㯳)이 봉헌한 어필 즉, 연흥부원군자손가 보장 어필을 모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숙종의 발문 일자가 임진춘정월상원일(壬辰春正月上元日)이고 승정원일기의 봉헌기록이 같은 해인 1712년 1월 5일부터 8일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의심이 없다.

 

의문점은 칠장사에서 지금까지 줄곧 소장하고 있는 인목왕후어필칠언시를 어떻게 연흥부원군의 현손(玄孫)인 김상윤(金相尹) 가에서도 보장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추측컨대 연흥부원군자손가 보장본은 연흥부원군의 손자대(孫子代) 이후에 칠장사 소장 어필을 모사하여 보장해온 것으로 짐작된다.
이 모사본이 전계군(全溪君)댁으로 들어가고 다시 왕궁(王宮)으로 봉헌한 것을 숙종38년(1712년)에 왕명으로 모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Ⅴ. 제언(提言)

 

인목왕후어필칠언시가 혹 왕후께서 손수 지으신 시가 아닐까 내심 기대도 하였으나 명(明)나라 장면의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수사한 사실을 알고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러나 인목왕후께서 친히 수사하신 금광명최승왕경은 어필칠언시 못지않게 값진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큰 소득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보물로 지정될 예정이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금광명최승왕경은 한권의 길이가 12m이고 모두 10권이니 무려 120m의 백지(白紙)위에 수많은 불경의 글귀를 옮겨 쓰시고 매권마다 발원문을 쓰셨으니 인목왕후의 염원(念願)이 깃든 역사적 유물임을 알아야 한다.

 

정명공주(貞明公主)의 현손인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선조(宣祖)와 인목왕후의 어필(御筆)을 모아 영조(英祖)17년(1741년)년에 엮은 목릉신한첩(穆陵宸翰帖) 발문이 이계집(耳溪集) 권(卷)16 제발(題跋)편에 실려 있다.
목릉신한첩(穆陵宸翰帖)을 비롯하여 인목왕후어필이 어디엔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인목왕후의 알려지지 않은 유물들을 발굴하고,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세상에 바르게 알리는데 힘써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시중에 잘못된 자료들이 무분별하게 나돌고 있는 것을 볼 때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런 잘못된 정보(情報)들을 바로잡아 가는데 이번 연구를 통하여 얻은 내용들이 활용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리스트

『을유보서(乙酉譜序)』 분석(分析)을 통한 편수경위(編修經緯) 고찰(考察)
“延安金氏四門博士 暹漢의 上系文獻에 대한 尋究”에 대한 소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