譜學硏究論壇




“延安金氏四門博士 暹漢의 上系文獻에 대한 尋究”에 대한 소견
작성자 : 김수영 작성일 : 2017-09-15 15:05:24       조회수 : 1362 파일 :

“延安金氏四門博士 暹漢의 上系文獻에 대한 尋究”에 대한 소견


延安金氏大宗會 副會長 金思均
(존칭 생략)


옛 문헌에 기록하기를“문벌을 말할 때는 으레 延金을 들추었다”고 하였으니 연안김씨는 오래전부터 국중화족이요 숭문사족으로서 도도히 살아온 문벌씨족이다.
연안김씨는 고려 명종조(재위1170~1197) 국자감 사문박사 暹漢을 시조로 한다. 일반적으로 씨족의 상계는 족보를 통하여 알지만, 연안김씨는 족보 외에 상계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 있으니 이것이 곧 1514년(중종9) 초주갑인자본으로 간행된『顔樂堂集』이다.
안락당집은 11世 安老(1481성종12)~1537(중종32)‧중종조 좌의정)가 1513년(중종8)에 先考(號,顔樂堂, 諱,訢 1448(세종30)~1492(성종23)‧성종조 공조참의)의 문집을 정리하여 다음해에 간행한 문집이다. 4권 2책으로 되어 있는데 1‧2권은 선고의 문집이고, 3권은 안로 직계의 상세계 족보와 비문이고, 4권은 유행‧묘지명‧발문이 있고, 마지막에 이 족보(上世系)를 만든 연유와 참고문헌을 적었다. 이 문집 3권 첫머리에 연안김씨 상세계가 상당한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1516년(중종11)에 영천군수 권오기가 이 문집의 번각본을 간행하였다. 현재 대종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영천간 목판본『顔樂堂集』(奉正大夫行郡守權五紀皇朝正德丙子孟秋榮川郡開刊)은 번각본 4권2책중 3권의 복사본이다. 번각본은 모두 4권2책 156판인데 현재 서문과 1권부터 2권의 36판까지는 서강대학교도서관에, 2권의 37판부터 끝까지는 충남대학교도서관에, 3권과 4권 및 발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1514년간 초주갑인자본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러니 연안김씨의 상계는 족보를 통하여 알뿐만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안락당집을 통하여 더욱 확실하다고 하겠다. 그러기 때문에 안락당집은 연안김씨에 있어서는 근본문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시조 暹漢의 先世系 기록이 없다. 다만 안락당집 3권 世系말미에 “國子博士諱暹漢是其後孫由博士公以上世遠無籍不可考”라 하였으니 박사공 이상은 세대가 너무 멀고 상고할 자료가 없어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득관 이래 9백년을 살아왔다. 그러다가 근간에 와서 몇몇 후손이 시조의 선세계를 찾아야겠다는 숭조일념으로, 고서를 뒤지고 여러 족보를 두루 섭렵하면서 족보 尋究의 열정을 보이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만시지탄이 있으나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현황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갈래로 계대를 찾고 있다. 하나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3자 文汪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 신무왕의 2자 英光의 계통이다.

系譜硏究(사단법인 경주김씨계보연구회간) 2007년 추‧동계 합본 p36에“延安金氏四門博士 暹漢의 上系文獻에 대한 尋究”(始祖四門博士諱暹漢 30世孫 曉覺 金東熙)라는 글이 실렸기에 그에 대한 나의 소견을 피력한다.

p36“尋究 및 硏究課程”

 “1)”항에 대하여
己亥譜(1719년간) 범례에“高麗明宗時始祖博士公以直諫謫 延安仍籍焉”이라고 기록한 것은 顔樂堂集을 보지 아니한 임의적 기록으로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고, 후손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또 乙酉譜(1765년간) 편저자인 載久(19世 연안부사)도 乙酉譜 序文에서“舊譜謂博士公以直諫謫延安仍籍焉不知何所據也”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顔樂堂集에는“國子博士諱暹漢是其後孫”이라 했을 뿐이니 즉 시염성으로 귀양을 간 분의 먼 후손이 暹漢이라 하였다.

“2)”항에 대하여
新羅三姓淵源譜(1934년),(初木刊本(1642년)金景大刊行) p20 同源金氏分貫錄中 延安金氏는 내용에 허위가 너무 많아 수용이 불가능하다.
①“殷說公十四世孫暹後一云暹漢后”는 殷說의 後孫이 아닌 것이 판명되었고,
②“高麗明宗朝四門博士入大明登科”는 暹漢은 명나라에 가서 제과에 급제한 사실이 없다. 暹漢의 5代孫 濤가 洪武4년(1371년 공민왕20년) 明나라 制科에 120명중 25등으로 급제하여 東昌府丘縣丞의 벼슬까지 받았다. 이 사실은 高麗史列傳. 東史會綱 洪武4年會試記(魏禧-永淑大明人), 연안김씨 세사(1) 등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高麗明宗시기는 중국에서는 宋나라 시대다.
③“新羅王子英光後暹漢”이라는 기록은 확인할 수 없는 기록이다. 英光에서 暹漢까지의 系代 說明이 없고, p45 英光의 아래에 아무런 系代記錄이 없다.

  

 ④“兄弟以直諫忤主旨謫遠地”는 暹漢의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라시대 어느 때에 왕에게 직간을 하였다가 귀양을 간 그 형제를 말하는 것이다. 형제중 아우가 시염성으로 귀양을 와서 살았고, 그 분의 먼 후손이 暹漢이다.
⑤“銑文判書孝獻公后”: 銑은 20世 內資寺尹公派 宗人으로 1750년(영조26)에 나서 1837년(헌종3)에 졸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刑曹判書(1829.순조29)를 지냈다. 이 기사가 본문에 실렸으니 同源金氏分貫錄의 延安金氏는 1870년에 간행된 延安金氏 庚午譜가 결정적으로 참고 되었을 것이다. 銑은 1642(신라삼성연원보)에는 출생하지도 않았는데 신라삼성연원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만저만한 넌센스가 아니다. 그러니 본항( 신라삼성연원보에 기록된 연안김씨)은 객관성과 신뢰성이 결여된 신용할 수 없는 기록이다. 아마도 후대사람이 신라삼성연원보를 재간행하면서 다른 문헌의 내용을 합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3)”항에 대하여
周元의弟 奈興..顔樂堂集에는“兄居北濱京 弟居豉鹽城 ”이 라고만 했지 北濱京으로 간 사람이 周元이고, 豉鹽城으로 간 사람이 奈興이라는 기록은 일언반구도 없다. 다만, 후대 사람이 주석을 달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顔樂堂集 文獻은 考證資料로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은 시기상조이다.

“4)”항에 대하여
東國金氏文獻錄(1868년 戊辰)중 “延安金氏先祖暹漢新羅王子后也 高麗明宗朝四門博士入大明登第”기록은 신라삼성연원보 p20 同源金氏分貫錄 延安金氏와 동일하다. 내용에 허위가 있고, 1870년에 간행한 연안김씨 庚午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5)”항에 대하여
後孫 裕簡知門下省事一派는 金海金氏가 아니고 延安金氏 로 밝혀졌기 때문에 재론할 이유가 없다.

“6)”항에 대하여
萬姓大同譜에는 暹漢의 上系는 없다.

“7)”항에 대하여
暹漢은 분명히 고려시대 사람이다.
신라시대 어느 때에 시염성(지금의 연안)으로 귀양을 간 분 의 후손이다. 그러니“新羅時有王子兄弟”의 형제는 暹漢의 형제가 아니고, 시염성에 처음 귀양 온 분의 형제를 말한다.

“8)”항에 대하여
“※특히 二子英光을 延安金氏라 한 것은 顔樂堂遺集 新羅 三姓淵源譜에 英光后孫云云에 따라 附記한 것임을 밝힙니 다”에서
① 顔樂堂集(顔樂堂遺集은 존재하지 않음)에는 英光의 後孫 이라는 기록이 없고, 1940년에 간행된 工部典書公派譜(첫 머리에 英光後孫이라 기록)와 顔樂堂集을 혼동하고 있다.
② 新羅三姓淵源譜(p45)에는 英光의 後孫기록이 없고, p20 同源金氏分貫錄 延安金氏는 내용에 허위가 많을 뿐 아니라 英光後孫의 계대기록이 없다. 1870년에 간행된 庚午譜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후대의 어느 분이 합철한 것이다.

“尋究綜合 暫定結論”에 대하여

“『顔樂堂』遺集에〔暹漢은 新羅王子 英光의 後孫〕”에 『顔樂堂』遺集은 공식적으로 “顔樂堂集”이고 “英光後 孫”云云은 工部典書公派譜(1940년간) 첫머리에 있는 기록으로 顔樂堂集과는 관계가 없다.
“※暫定延安金氏系代”표를 보면 新羅三姓淵源譜에 기록된 英光의 後孫系代가 하나도 없는데 어느 文獻을 根據로 하여 이 계대가 나왔는지 궁금하고, 마치 死後養子入系하는 것 같은 짜맞추기식 계대라고 생각되며 판단의 횡포가 될 수 있다.
끝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검정도 확인도 안된 고문서의 한 줄 기록에 현혹되어 씨족사의 근본을 흔드는 우를 범하지 말고, 자기 조상이 쓴 기록에도 족보심구의 열정을 경주 했으면 좋겠다. 팔은 언제나 안으로 굽는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文汪 系統의 尋究

1. 顔樂堂集(1514년간) 世系에는“兄居北濱京弟居豉鹽城”이라고만 하였을 뿐 북빈경에 간 사람이나, 시염성으로 간 사람이 누구라는 구체적 기록은 없다. 그런데 乙酉譜(1765년 간)부터 괄호를 사용하여 “北濱京(今江陵府) 豉鹽城(今延安府)라고 주석을 달았고, 또 1961년 통영에 건수한 始祖高麗國子監四門博士祭壇神道碑文에는 ”兄은 北濱京으로 귀양을 가서 江陵金氏의 시조가 되고, 아우는 시염성으로 귀양을 가니 곧 연안김씨의 원조가 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모두 원문을 제대로 전수하지 못하고 후대 사람들 이 친절하게 자기 생각을 덧붙인 결과이다.

2. 興基(24世 내자시윤공파덕산종중, 1857年生. 1934年卒. 進士,양양부사)는 자기가 소장하고 있던 1901년(辛丑)에 간행한 연안김씨의민공파보 하권의 말미에 다음의 기록물을 첨부하였다.
 <표1>
 1閼智→2勢漢→3阿道→4首留→5郁甫→6仇道→7味鄒王→8奈勿王→9卜好→10習寶→11智證王→12立宗→13眞興王→14眞智王→15龍春→16武烈王→17文汪→18大忠→19思仁→20惟靖→21奈興→22慶徵→23榮→24宗儒→25崇一→26康義→27景暎→28頊成→29承興→30獻→31支柱→32珥佰→33陟→34直輝→35用度→36忠霖→37渥→38舜孫→39暹漢

3. 내자시윤공파 괴산종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延安金氏史略」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표2>
 1閼智→(생략)→20惟靖→21奈興→22慶徵→23諱榮→24宗儒→25崇一→26康義→27景暎→28頊成→29承興→30巘→31支柱→32珥佰→33陟→34直輝→35用度→36忠霖→37渥→38舜孫→39暹漢

4. 두 기록물은 23대 榮과 諱榮, 30대 獻과 巘이 다를 뿐 내용이 동일하다.

5. <표1>과 <표2>는 1代 閼智로부터 38代舜孫까지는 新羅三姓淵源譜(昭和9년간, 저작겸발행인 金景大) p41(후면) p43(전면·후면) p45(후면) p48(후면)의 내용과 일치한다. 다만, 32代 단(삼성연원보)과 珥佰(표1과2)이 차이날 뿐이다.

6. <표1>과 <표2>는 어떤 문헌에 근거하여 39대에 暹漢을 기록하였는지 그 사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7. 대수를 따져보면 奈興 21代 暹漢 39代로 대수에 현격한 차이를 보여 문제가 되는 것 같으나, 신라삼성연원보 p48(후면) 仁揆의 사위가 仁川李之彦이니 이는 李資謙의 4子이다. 之彦은 38代 舜孫(暹漢의父)과 동시대가 되니 39代 暹漢의 연대는 1130~1140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표3>
삼성연원보 仁揆 女李之彦
 仁川李氏 李資謙 李之彦
표1˙2 渥 舜孫 暹漢
※ 李資謙의 연대 : 1060~1126

 8. 결론하여 말하면 현 상황으로서는 文汪의 계열이다 英光 의 계열이다 라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오늘의 오류가 내일의 正史가 되는 愚를 범하게 된다. 좀더 시간을 두고서 객관성이 보장되고 많은 사람이 납득하는 확실한 문헌이 제시될 때 비로소 가부를 논해야 한다.

文汪 계통으로의 심구핵심은 暹漢이 어떻게 하여 39代가 되었는가 하는 근거를 찾는데에 있다. 또 英光 계통으로도 계속 尋究하여 公認되는 系代가 제시된다면 중론을 집약할 만하다. 그러니 우리는 양 계통을 계속 심구할 필요를 느낀다.
더는 늦출 수 없는 우리 대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이므로 모두는 사명감을 갖고 헌신진력해야 할 것으로 안다.

※ 오기 지적
1. 東熙 는 연안김씨개성부윤공파 정주종중 서남문중으로 30世이고, 시조 暹漢의 29世孫이다.
2. 系譜硏究 p36左
본문2행`顔樂堂遺集`은 공식으로 `顔樂堂集`이다.
3. p36 左
본문2행`15世孫 安老`는 `10世孫 安老`이다.
4. p36 左
본문26행`朝鮮肅宗49`는 `朝鮮肅宗45`이다.
5. p37 右
본문14행`顔樂堂遺集`은 1940년에 간행된 `공부전서공파보`를 착각한 것 같다.

리스트

인목왕후어필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에 대(對)한 소고(小考)
增補文獻備考氏族編 延安金氏와 有關條에 杜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