譜學硏究論壇




연안김씨 선계연구(족보의 변천을 중심으로)
작성자 : 김수영 작성일 : 2017-09-15 14:43:54       조회수 : 1204 파일 :

연안김씨 선계연구(족보의 변천을 중심으로)


博士公25世孫 壽泳(直講公派羅山宗中)

 

 최근에 박사공의 선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들이 홈페이지에 게재되고 있어 이를 방치할 경우 일파만파로 와전되어 젊은 층에게 이것들이 마치 정설인양 잘못 인식될 가능성이 있기에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족보제도(族譜制度)가 없었다.
그러다가 고려후기에 와서 비로소 자기 조상에 대한 기록을 하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현대의 족보처럼 씨족 전체를 망라한 대동보는 없었고 다만 각자 자기 조상만을 간단하게 기록한 가승(家乘)정도만 만들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고려 초기에는 조상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고려후기부터 기록해 오던 가승들이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그 분량이 점점 많아지고, 같은 씨족이 많아짐에 따라 이것을 하나의 책자로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으로 족보를 만든 것은 조선 성종7년(1476) 안동권씨 성화보(成化譜)이며,그 다음은 명종20년(1565)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이다.
다시 말해서 그 이전에는 모든 가문이 각자 가승만 가지고 있었을 뿐 족보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연안김씨도 이시기에 족보를 간행하였다는 증거가 있다. 안락당집(1516년 간행)에서 희락당 안노공은 세계를 기록하면서 고보를 방증으로 삼는다 하였고, 기해보(1719년 간행)에 고보 또는 인보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이 그를 증명하는 것이다. 다만 그 고보 또는 인보가 체계적인 족보였는지 가승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인보는 인쇄한 보첩이라는 뜻으로 아마 족보일 것으로 추측되나 불행하게도 현재 전해오지 않는다. 현재 전해오는 것은 1719년에 간행한 기해보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에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 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자기의 조상이 실전되었다고 하면 집안이 한미하거나 명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인정될까 두려워하여 기록에 없는 부분을 실전(失傳)이라고 하지 않고 조작하여 허위로 기록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족보제도가 없던 고려 초부터 일목요연하게 한 대(代)도 빠짐없이 있는 것이 더 의심할 일이지 실전하였다고 기록한 것이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신라가 망한 후 그 왕족의 후손들이 고려시대에 족보 또는 가승을 기록하여 가지고 있었는가.
신라 왕족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고려의 명문거족들도 조상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 와서 천년 전의 계보를 밝힌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1900년대에 여러 김씨들이 족보를 만들면서 천년 전 신라말 고려초에 살던 신라김씨 후손들의 계보라는 것을 만들어 족보에 첨가하였는데 각 김씨별 족보마다 다르다.
천년 전의 일을, 더구나 기록도 없는 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또 하나는 조선 말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족보는 더욱 문란해지고, 특히 일제시대에 와서는 족보를 허위로 만들고, 실제로 그런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이 확실한 고증 없이 만든 문헌들이 있었다. 그러니 그 내용이야 뻔한 일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사서류에 우리 연안김씨의 시조 박사공의 행적을 왜곡하여 기록한 것이 있고, 심지어 경순왕의 후손이니 신무왕의 후손이라고 기록된 것도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조상의 뿌리는 정확해야합니다. 허위로 관직을 등재하고, 근거도 없이 무열왕의 후손이니, 경순왕의 후손이니, 신무왕의 후손이니 하여 무엇에 쓰겠는가.

우리 연안김씨는 1500년대에 족보를 간행한 근거가 있고, 같은 시기에 간행된 안락당집에 시조 박사공의 세계기록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500년 전에 시조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긴 뿌리가 확실한 집안이며 대대로 명문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역사의 기록이란 흔히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록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고 근거가 명확한 역사만을 기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당당하게 시조 박사공 이상의 선계는 “불가고”라고 표현하였으니“불가고”가 우리에게 결코 부끄러운 역사가 아님을 알아야한다.

종친 여러분! 옛날 우리 조상들은 지금 우리에 비하여 조상숭배의 정신이 훨씬 투철하였고 학식 또한 해박하였으며, 보학에 관하여는 우리가 상상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오죽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불가고“라고 결정하였겠는가.
후손의 입장에서 선조의 행적을 연구하는 것은 장려할 일이나 이를 왜곡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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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補文獻備考氏族編 延安金氏와 有關條에 杜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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